순방 중 명품 쇼핑 논란, 제2부속실이 답일까?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기자]
▲ 리투아니아 매체 <주모네스>는 지난 12일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가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옷 가게를 방문했다고 보도했다. |
ⓒ 주모네스 |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의 시청광장 주변에 있는 명품 가게 5곳을 모두 방문했다는 현지 언론의 보도는 대통령 순방의 취지와도 맞지 않고 영부인으로 존칭 되는 대통령 부인의 자세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김건희 여사의 활동을 '제도화'하기 위해 제2부속실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의 활동을 공적 영역으로 끌어들이면,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언급하는 '법과 원칙'에 따라 영부인이 활동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반영된 의견이다.
윤석열 정부가 없앤 제2부속실을 재설치하면 영부인의 활동이 좀 더 제도화될 수는 있다. 하지만 영부인 부속실 제도가 정비되던 1960년대 후반 빛 1970년대 초반 상황을 고려하면, 이 시스템이 대통령 부인을 제약하기보다는 도리어 날개를 달아줄 수도 있어 보인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인 육영수가 영부인 자격으로 대중 앞에 활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5·16 쿠데타 3년 뒤인 1964년부터다. 그해 12월 14일 자 <경향신문>이 "정부 고관 및 저명인사 부인들의 모임"이라고 소개한 양지회를 이끌고 대중 앞으로 나아갔다
그달 24일 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서독을 방문하고 돌아온 육영수는 "그곳 여성들의 검소와 적극성에 감명이 깊었다"라며 "새해엔 적극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일에 앞장을 서겠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언급한 단체가 양지회다. 위 기사는 "고관 부인의 모임인 양지회를 통해서 영세 여성 근로자의 숙소와 여성회관 등의 건립에 힘을 내겠다고 다짐"한 사실을 보도했다.
양지회는 왕후를 중심으로 관료 부인들을 조직한 조선시대 외명부와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양지회가 그런 위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은 1969년 장마철에 경복궁 궐내에서 벌어진 이벤트에서도 드러난다.
그해 7월 10일 자 <경향신문>은 "박정희 대통령 내외는 10일 하오 6시 양지회 주최로 경회루에서 열리는 재해민 구호기금 마련을 위한 자선의 밤 파티에 참석한다"고 보도했다. 다음날 발행된 <조선일보>에 따르면, 1시간 동안 걷힌 구호기금은 1338만 원이었다. 궁궐 연회가 열리던 경회루에서 대통령 부인과 함께 이벤트를 벌이는 양지회의 모습은 이 단체가 외명부 비슷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가 11일(현지시간) 빌뉴스 대통령궁에서 열린 리투아니아 대통령 주최 공식만찬에서 에마뉘엘 프랑스 대통령 배우자인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 대통령실 |
육영수가 양지회와 함께 공개 활동을 본격화한 1964년은 박정희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이 싸늘해진 뒤였다. 쿠데타 후로도 계속 '상황이 종료되면 군에 복귀하겠다'던 박정희는 대국민 약속을 깨고 1963년 10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더니, 대통령이 된 직후부터는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본격 추진해 전 국민을 또다시 놀라고 화나게 만들었다.
한일협정에 분노하는 국민들의 저항 때문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힘들었던 박정희는 대통령 취임(1963년 12월 17일) 6개월 만인 1964년 6월 3일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날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서는 박정희 하야 구호가 터져 나왔다(6·3운동).
이렇게 민심이 싸늘해진 상황에서 육영수는 남편과 판이한 이미지로 국민들에게 다가갔다. 이것은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을 어느 정도 바꾸어 놓았다. 1964년과 1965년에 민심을 크게 잃은 박정희가 4년 뒤 3선 개헌을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육영수의 이미지도 한몫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그녀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사실은 박정희가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극진한 내조를 펼쳤다"고 평한다.
육영수의 공개 활동은 남편의 독재를 돕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우상화에도 적지 않게 기여했다. 1971년에 제1회 대통령영부인배 쟁탈 전국여자테니스대회, 대통령영부인배 쟁탈 제1회 어머니 배구대회 등이 열리고 이듬해에 제1회 대통령영부인배 쟁탈 전국여자탁구대회 등이 열린 것은 1969년 3선 개헌과 1972년 유신체제 선포로 박정희가 우상화되는 시기에 그의 부인도 함께 우상화된 상황을 반영한다.
그런 시기에 일어난 일이 영부인 부속실의 정비다. 1996년에 한국행정연구원이 펴낸 <대통령비서실의 조직과 기능>은 "대통령 내외를 가장 측근에서 보좌하는 부속실이 1969년 신설되었는데, 이는 이후 대통령 부속실(1부속실)과 영부인 부속실로 개편되어 유지되었다"라고 설명한다.
대통령과 함께 그 부인을 보좌하는 부속실이 1969년부터 작동하다가 1972년 들어 부인만 따로 보좌하는 부서가 독립했다. 대통령 부인의 공개 활동이 왕성해지고 그 결과로 영부인 우상화가 나타나는 시기에 이 같은 제도적 정비를 추진한 것은 영부인을 억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부인을 적극 보좌하기 위해서였다.
▲ 2017년 4월 4일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매장에 <전두환 회고록>과 <이순자 자서전 - 당신은 외롭지 않다>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
ⓒ 권우성 |
이순자는 자서전인 <당신은 외롭지 않다>에서 제2부속실에 보좌관 3명을 둘 수 있었지만 자신은 2명밖에 두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실수를 피하고 꼭 해야 하는 일만 하려는 소극적인 자세를 갖고 있던 나는 보좌관을 세 명씩이나 두는 것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라고 한 뒤 "제2부속실로 들어오는 모든 민원 사항도 반드시 대통령 비서실과 협의를 거치도록 하는 등 안전제일주의를 지켰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2부속실의 도움을 받아 내가 치러야 했던 공식 행사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영빈관에서의 행사였다"고 말했다.
이순자는 제2부속실이 치른 공식 행사만 언급하고 '비공식 행사'는 거론하지 않았다. 제2부속실을 안전제일주의로 운영했다는 그의 진술을 무색게 만드는 '비공식 행사'는 한둘이 아니었다. 제2부속실이 비자금 창구가 됐다는 의혹을 받은 것이 그중 하나다.
1984년에 이순자가 이사장 자격으로 설립에 참여한 새세대심장재단은 전두환 집권기에 300억 원 상당의 기부금을 받았지만, 심장병 수술비로 지원된 70억을 제외한 나머지 돈의 행방은 묘연했다. 묘연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989년 1월 13일 국회 5공 특위(제5공화국에 있어서의 정치권력형 비리조사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장동렬 새세대심장재단 사무국장의 진술에서 나왔다.
다음날 발행된 <경향신문>은 장동렬 사무국장이 새세대심장재단의 기금 모집과 관련해 "청와대 접수분 1백 99억 원 중 1억 원 이상은 이순자 씨가 직접 받았고, 1억 원 미만은 제2부속실에서 접수했다"고 증언했음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청와대 접수 장부는 이씨가 직접 보관했다"는 증언도 함께 소개했다.
이순자가 청와대 장부를 직접 관리하는 가운데, 1억 이상은 그가 직접 받고 1억 미만은 제2부속실을 통해 받았다. 제2부속실이 접수한 돈 역시 당연히 이순자 수중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순자는 소극주의적 태도로 제2부속실을 운용했다고 진술했지만, 실제로는 적극주의적 태도로 이 부서를 활용했던 것이다. 육영수뿐 아니라 이순자 때도 제2부속실은 영부인을 견제하는 곳이 아니라 영부인의 수족이 되어 영부인을 강화시키는 곳이었다.
제2부속실 같은 제도적 장치가 대통령 부인을 견제하는 효과를 낳을 수는 있지만, 육영수·이순자 사례는 그런 장치의 위험성도 함께 보여준다. 자신의 영역과 남편의 영역을 제대로 분간하지 않는 영부인이 출현하면 제2부속실이 오히려 날개를 달아주는 역기능이 발생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는 점을 두 사례가 증명했다.
대통령 주변의 비선 권력들에 대한 감시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구축하는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 상태에서 부서 하나를 신설하는 것이 문제의 해법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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