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만 3000명 사망... 1956년 한국군엔 무슨 일 있었나
[김도균 기자]
1954년 2988명, 1955년 2660명, 1956년 2710명, 1957년 2001명...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한해 2000명이 훌쩍 넘는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국방부가 집계한 통계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56년 사망자는 2710명으로 돼 있지만, 최근 육군이 대통령소속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에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같은 해 육군에서만 2986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쟁 상태도 아닌데 1년 동안 보병 연대 규모의 장병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도대체 1956년 대한민국 국군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 1955년 3월 15일 원주 제1군사령부에서 열린 제1군사령부 창설 1주년 기념식 당시 모습. |
ⓒ e영상역사관 갈무리 |
지난 2022년 10월 법과사회이론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법과 사회> 제71호에 실린 <1950년대 군의 이른바 '후생사업'의 한 단면> 논문은 이런 의문을 풀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군사망사고진상규명위원회(위원회) 진정사건 조사 자료를 중심으로'라는 부제가 달린 논문은 한상미 조사관(주저자)과 송기춘 위원장(교신저자)가 함께 작성했다. 논문의 주요 대목을 요약해 소개한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군은 부족한 군 재정 확보를 명분으로 군인을 동원해 이른바 '후생사업'을 벌였다. 사전적 의미로 후생(厚生)은 '사람들의 생활을 넉넉하고 윤택하게 하는 일'이란 뜻이지만, 군이 부대 운영자금을 보충한다는 명목으로 벌인 후생사업의 실상은 시민이나 병사들의 후생과는 무관했다. 부대에서 돈벌이를 하는 방법은 매우 다양했다.
군용 트럭을 민간인에게 임대하거나 군인에게 운영하게 해 돈을 납부하도록 하고, 병사들에게 약초를 채취하거나 뱀, 물고기를 잡아 팔도록 해 이익을 취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군인을 맨몸으로 후방으로 보내 월 2만~3만 환을 벌어오도록 했으니 이것이 이른바 '몸둥이 후생사업'이다. 부유한 군인은 부대에 돈을 내고 사회에서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반면, 가난한 이들은 납부할 돈을 마련하지 못해 집안의 논밭을 파는 등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했다.
1955년 입대해 15사단 50연대 인사계에서 근무한 전OO씨는 위원회 참고인 진술을 통해 '후생사업은 군단장, 사단장, 연대장 등의 지시에 따라 시행됐고, 이런 상황은 전군이 예외가 없었다'고 밝혔다. 전씨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15사단에서 시행한 후생사업은 차량 대여, 목재(벌목)공장 운영, 참나무 껍질(굴피) 판매, 뱀장사, 금광운영, 미싱사, 군화 수선, 도장쟁이, 주보(마트) 운영, 참숯가마 운영, 땔나무 장작 장사, 약초 채취, 물고기 잡이, 가설 극장 운영 등 총 14가지에 이른다.
후생사업은 군의 부족한 재정 충당이라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군의 직무수행과 관련 없는 일에 군인을 동원한 것으로, 노동력 착취와 대가 미지급으로 인한 문제나 열악한 주거환경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군의 기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휴가 나온 사병이 안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데리러 가보면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다'고 귀대를 거부하는 판이었다. 날마다 군단장 숯굴, 사단장 숯굴, 대대장 숯굴 숯을 구워주는 데 동원되고 땔감과 건축자재용 목재를 잘라내는데 사역을 하다보니 중대원 100명 가운데 부대에 남아 있는 인원은 10명 남짓했다. 상부에서 검열이 오면 이웃부대에서 병력을 꾸어와서 속여넘기기도 했다. 많은 장교들이 도둑질로 먹고 살고 있었다." <조선일보> 1959. 1. 20
"병사몫 부식 없어서 쓰레기통 뒤져 먹었다"
후생사업을 위해 규정에 위반되는 출장이나 파견, 군수물자 임대 등 불법적 수단이 동원되자 이런 불법적 사업의 약점을 기화로 금품을 갈취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일종의 수탈 피라미드가 형성된 것이다. 1955년 3월 28일 열린 국회 정기회의에서 강승구 의원(자유당)은 헌병대가 군수물자 운반이나 작전에 사용하지 않는 운행 트럭을 조사하고 단속하면서 차량당 2만~3만 환을 받고 차량에 탑승해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하는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고 있다.
군복무를 하던 군인들을 사적으로 동원해 후생사업을 벌이다 보니, 여기 종사하던 군인이 자해사망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군복무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7사단 전OO 하사 사건 참고인 김OO씨는 '우리 중대는 중대원들이 나무를 하거나 약초를 캐러 다녔다. 중대장이 약초를 캐오라니까 캐러 다녔고, 약초를 캐와 중대장에게 주었는데 돈을 받거나 한 것은 없었다'고 했다.
또 다른 참고인 최OO씨는 '부대에 돈이 없으니까 병사들에게 돈을 벌어오라고 일을 시켰고, 그래서 나는 숯 공장에서 일했다'고 진술했다. 같은 사건 참고인 최OO씨는 '그때 생각하면 죽는 것이 났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자살한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잘 죽었다 하는 생각도 했었다. 죽은 사람의 고통을 모두 이해를 했었으니까, 우리는 차라리 죽지 못해 산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군이 직접 돈벌이에 나섰지만 부대원 모두가 고르게 혜택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부식 등 생활에 필요한 물자는 여전히 부족했다. 참고인 김OO씨의 진술이다.
"부식이 나와도 중대장에게 다 들어갔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선임하사 등에게 들어가고 나면 병사들에게는 돌아오는 것이 없어서 쓰레기통도 뒤져 먹고 했다. 국은 소금국에 참 어려웠고, 배가 고파서 훈련받기가 힘들 정도였다. 행군하다가 밭에 있는 배추, 무 뽑아 먹고, 부대 근처에 학교에서 나온 쓰레기 뒤져서 먹고 했다. 배가 고파 도망가는 병사도 많았는데 잡혀 오면 죽어라 맞았다. 6년간 군대 생활하면서 휴가는 3번 갔다. 휴가를 줘도 돈이 없어 집에 갈 수가 없었다."
숯 공장이나 벌목장 등 후생사업 현장의 열악한 주거와 노동환경은 참사를 초래하기도 했다.
1956년 2월 27일부터 사흘간 동부전선 3군단(3·5·6사단) 지역에는 적설량이 3m에 이르는 엄청난 눈이 내렸다. 박정희 준장이 사단장으로 있었던 5사단에서만 59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3군단 전체로는 118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숯가마 작업에 동원된 부대원 임시막사가 무너져 12명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폭설사고 당시 5사단 36연대에 근무했던 박OO씨의 진술에 따르면, 이 막사 안에서는 1명만 살아 병원으로 후송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망해 사망자 인식표만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후생사업의 비극적 단면은 강제적으로 장기복무를 해야했던 병사들 사례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군은 후생사업에 투입할 장기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병사들을 강제적 장기복무로 내몰았다. 휴전협정 체결 후 1954년부터 1968년 1.21사태 이전까지 병사 복무 기간은 36개월에서 30개월로 점차 단축됐다. 하지만 후생사업을 적극적으로 벌였던 일부 부대 실상은 이와는 달랐다. 위원회는 후생사업에 동원돼 무려 64개월 동안 복무 중 사망한 전OO 하사 사건을 예로 들었다.
1955년 1월 훈련소로 입대한 고인은 같은 해 10월 제1군사령부로 전속됐다가 제7사단 8연대 2대대로 전입했다. 이후 후생사업에 동원된 고인은 당시 법정 복무기간인 33개월의 2배가량인 64개월을 복무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군 당국이 작성한 전 하사 사망 기록에는 '불우한 가정환경을 이유로 제대를 희망했으나 제대하지 못함을 비관해 총기 자해'했다고 기재돼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사망 당시 고인의 계급은 하사였다. 당시 적용되던 육군규정에는 '초등학교 미수료자, 체격 등위가 병종 이하인 자'는 하사관(현재 부사관)이 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는데, 고인은 체격조건 미달로 군 면제를 받았던 이력까지 있었다. 하사관은 고사하고 입대조차 할 수 없었던 고인이 64개월이나 복무했던 것이다. 위원회가 고인과 비슷한 시기에 입대해 같은 날 1군사령부에 전속한 14명의 복무기간을 조사했더니 42개월에서 68개월까지 천양지차였다. 그런데, 전역 당시 계급은 동일하게 모두 병장이었다.
비밀은 이랬다. 군이 하사관 후보생이란 제도를 악용해 병사를 하사로 진급시켜 장기복무 시킨 다음 전역직전 하사 계급을 해임, 병장으로 강등시켜 전역시켰던 것이다. 고인도 사망당시 계급은 하사였지만, 만약 제대를 했다면 병장으로 전역했을 터였다. 당사자들도 왜 자신들이 강등되어 전역했는지 알지 못한다고 위원회에 진술했다.
1954년 7월 독립 부대장급 이상 지휘관(주로 사단장)에게 병사 만기 전역 발령권이 부여된 이후, 일부 지휘관들은 이 권한을 악용해 병사들에게 강제적으로 하사관 후보생으로 지원하게 해 장기복무를 시켰다.
전역을 희망하는 병사들을 굶기거나 구타하는 방식으로 강제로 장기복무를 지원하게 했고, 이렇게 확보한 병사들을 '숯 굽기' '벌목' '약초 캐기' 등 후생사업 노역에 내몰았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후생사업에 투입되어 전역일도 기약할 수 없었던 병사들은 자포자기 상태가 됐다. 매년 2000명선을 크게 웃돌았던 1950년대 중반 군인 사망자 통계는 이렇듯 군 후생사업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논문은 "군의 후생사업은 당시 시대적인 부정부패의 모습이 군에서 나타난 측면도 있지만, 군 지휘관의 지휘권이나 전역명령권 등을 통한 포괄적인 인적 지배를 통하여 일종의 '노예제도 처럼 운영된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국가가 전면적으로 이 사업의 실상과 피해를 조사하여 망인의 명예 회복과 유족에 대한 보상 등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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