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임라이트]고요하고 깊은 연못처럼…무표정으로 전하는 풍부한 감성

이종길 2023. 7. 18.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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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류준열과 이해영 감독 '독전'
SK브로드밴드 B tv 토크쇼 '필모톡'
이해영 "모순된 연기 하나로 통합" 극찬
류준열 "서영락, 고민할 여지 주는 배역"

영화 '독전(2018)' 끄트머리에서 조원호(조진웅)는 노르웨이로 향한다. 주위가 하얀 눈으로 뒤덮인 외딴집에서 서영락(류준열)과 해후한다. 미묘한 시선이 진실에 가닿을수록 마음은 복잡해진다. 눈밭의 평온함조차 잠재우지 못할 혼란이다. 서영락은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다. 원호의 집념과 열정을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질기디질긴 삶의 숨결에서 잊지 못할 온기도 느꼈다. 늦었지만 장작불을 지펴 되돌려주려 한다. 사생결단을 피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장작불은 그들만의 캠프파이어다. 불씨와 함께 소중한 추억도 되살아난다. 원호는 잠자코 모른척한다. 목표를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려 막 종착역에 다다랐다. 제동을 걸기에 너무 늦어버렸다. 서영락의 손길을 애써 뿌리친다. "이 선생은 죽었어요." "그렇지, 공식적으로는. 근데 너 안 죽었잖아." 그제야 서영락은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숙무(宿霧)에 겹겹이 싸여 있던 진실한 내막이다. "그래서요? 제가 누군데요? 전 제가 누군지도 몰라요. (…) 이제 어떻게 하시려고요? 커피 드실래요?"

넌지시 건네는 권유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넉넉해진다. 동력은 입가에 감도는 가느다란 미소. 무표정으로 일관해온 터라 작은 변화마저 예사롭지 않게 나타난다. 류준열은 서울 마포구 동교동 티팩토리(T Factory)에서 진행된 SK브로드밴드 B tv 토크 콘서트 '필모톡'에서 "직관적 표현을 피해서 그리다 보니 생각보다 연기하기가 어려웠어요"라고 밝혔다.

"서영락을 제외한 모든 배역은 직선으로 내달리잖아요. 직접적이기도 하고요. 정반대되는 서영락으로 영화 전체의 균형을 맞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감정을 숨기겠다는 의도는 없었어요. 관객에게 고민할 여지를 만들어줄 수 있는 배역이라고만 생각했죠. 그래서 우회적이고 모호한 표현을 많이 가미했어요."

'독전'은 반전과 함께 판이한 얼굴을 드러내는 영화가 아니다. 차갑고 단단한 외피마저 서영락을 가리킨다. 이해영 감독은 마지막 신을 가리키며 "진심과 함께 많은 감정을 드러내나 이전의 서영락과 너무 다른 느낌을 주면 곤란한 어려운 촬영이었어요"라고 말했다. "자신이 어떻게 태어나서 자랐는지를 처음 밝히잖아요. 류준열은 그 얼굴을 이전의 포커페이스와 자연스럽게 연결해야 했어요. 그래야 조원호와 쌓아온 감정을 끝까지 가지고 갈 수 있었으니까요."

류준열은 모순된 연기를 그렇지 않게 보이는 걸 넘어 하나로 통합했다. 조진웅의 옅은 웃음까지 끌어내 비장미(悲壯美)를 극대화했다. 이 감독은 "파국이 예고된 상황에서 '커피 드실래요?'라는 한 마디에 낭만을 불어넣어 부드러운 전환점을 마련했어요"라며 "대사는 물론 표정, 호흡 모두 완벽했습니다"라고 극찬했다.

자연스러운 흐름과의 일체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있다. 바로 전체적인 감정선 유지다. 미발했다고 착각할 만한 선에서 세밀하게 묘사했다. 동영(김동영)·주영(이주영) 남매의 도움으로 어머니 제사를 지내는 장면이 대표적 예다. 담담하고 차근한 수어 연기로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한다.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나서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그런데 경찰들이 쫙 깔려서 장례도 못 치러드렸어."

이어지는 정적인 움직임에는 슬픔, 분노, 연민, 미움 등이 뒤엉켜 있다. 그런데 어떤 감정도 돌출해 있지 않다. 이 감독은 "류준열이 안으로 뜨겁게 느끼되 겉으로 표현하지 말라는 모순된 주문을 충실히 수행해줬어요"라고 복기했다.

"무표정으로 풍성한 감정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배우예요. 지방(紙榜)을 태우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다양한 감정을 고요하고 깊은 연못처럼 품고 있죠. 촬영장에서 유심히 관찰하며 연신 감탄했어요. 집중력도 상당해요. 염전 시퀀스를 거의 하루 만에 촬영했거든요. 쫓기듯 연기해야 했는데 날씨까지 무더웠죠. 혼자 정장을 갖춰 입고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해당 장면은 조원호가 서영락에게 측은지심을 가지는 결정적 계기나 다름없다. 영화 말미까지 이어져 조원호의 마음을 쉴새 없이 뒤흔든다. 조진웅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본다. 그는 "완성으로 인한 막막함과 허망함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맹목적으로, 악을 처단해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달려와 사건의 본체를 맞닥뜨리는 순간 드는 생각이다. 과연 기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완성했다고 할 수 있는가. 만약 모든 것의 끝이라면 이제 다시 시작은 무엇일까. 더 이상의 목적도 희망도 종식된 상태로 무언가를 찾기에는 나의 에너지 또한 그런 막막함으로 변해버렸다. (이해영 감독의) 어떠한 주문도 없었으나 막연히 창을 보고 싶었다. 진심으로 이 여정이 끝나는 것에 관한 질문을 스스로 반복했다."

서영락도 맞은편에서 같은 곳을 보며 사색에 침잠한다. 류준열은 "진웅 선배가 창을 바라봐서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라고 말했다. "조원호가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은데, 아닐 수도 있어서 확인차 봤던 것 같아요. 지금도 그 감정을 온전히 알지 못해요. 진웅 선배를 만나 자세히 물어보고 싶어요."

조원호만큼 심경이 복잡했을 서영락은 한 마디 물음에 정면을 응시한다. "넌 살면서 행복했었던 적 있냐?" 조진웅은 당시 류준열의 얼굴을 떠올리며 "서영락의 끝을 알고 있는 듯했다. 북받치는 감정으로 가득했다"고 말했다.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었을까. 이 감독은 고마움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류준열의 온전한 표현에 감사를 표한다. "조원호 덕에 처음으로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말할 기회가 주어졌잖아요. 지구 반대편까지 쫓아와 자신을 찾아주기도 했고요. 복수의 여정을 함께 하며 진한 연민까지 주고받았으니 감사가 가장 컸을 것 같습니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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