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살 회의록, 주민이 주인 대접... 이런 통장 취임식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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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숙 기자]
▲ 마을회의록을 소개하시는 신임통장 통장 이취임식에서 신임통장이 70년 이상된 마을 회의록의 내용을 주민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
ⓒ 조서람 |
내가 사는 곳은 대구시 동구 중대동이다. 지난 16일 마을에서 열린 통장 이·취임식에 참석했다.
"김아무개 통장님은 장장 8년간 중대 2동 통장을 맡아 하셨습니다. 그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참석한 주민들 자기소개가 끝난 후, 통장 이·취임식이 시작되었다. 지나가다가 플랭카드를 보고 들른 구의원님까지 함께 자리해서 더욱 진지한 분위기가 되었다. 총무님이 이임 통장님께 꽃다발을 드렸다.
"든든한 분께 통장직을 넘겨주게 되어 기쁩니다. 새 통장 같으신 분을 모시게 된 것은 우리 마을의 복입니다. 모쪼록 마을의 발전에 통장님을 중심으로 힘을 모을 수 있기를 빕니다."
새 통장님도 도라지꽃 같은 환한 꽃다발을 받으셨다.
"저는 경북에서 교사 생활을 하느라,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생활했습니다. 이제 퇴직을 하고 다시 고향마을에 와서 부모님이 사시던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통장으로 결정이 되고 나서, 인수인계를 받게 된 것 중 하나가 마을 회의록이었습니다."
새 통장님은 봉투에서 붓글씨로 써진 낡은 책을 주섬주섬 꺼내 드셨다.
▲ 마을회의록 1951년부터 작성한 중대동 마을회의록 |
ⓒ 이찬교 |
"이게 1951년부터 기록되었어요. 아시다시피 6.25전쟁 이듬해지요. 전부 한문으로 써져 있어요. 서두 글을 보면 '전쟁으로 인해 마을의 모든 기록이 없어져서 새로 회의록을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해요. 그때 팔공산 전투를 지휘하던 본부가 우리 마을에 있었나 봐요. 회의에서 나온 안건 외에도 마을의 수입과 지출에 관한 내용, 보유하고 있던 비품 목록 같은 것도 있어요. 마을 소유의 공동 논이 있었나 봐요. 해마다 쌀을 대여섯 가마 수확하면 그것으로 마을제사도 지내고... (중략)
한문으로 쓰다가 1993년때부터는 20대 젊은 통장이 취임하여 한글로 쓰기 시작했어요. 저희 선친이 통장직을 하실 때 당신의 필체도 수년 동안 여기에 있습니다. 한글세대에 의해 한글로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 마을 통장 2세대의 시작이라고 본다면 이번에는 3세대의 출발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마을 세대수가 220호입니다. 원래 사시던 분들은 총 서른 셋 가구이고, 집을 짓거나 사서 새로 오신 분들이 훨씬 많습니다.
3세대의 통장을 맡은 저는 양쪽의 힘들 모아 마을 화합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오늘 이·취임식도 통민 여러분에게 문자로 알려드렸습니다. 앞으로 통민 여러분들의 민원사항도 알아보려 합니다. 서식을 마련하여 댁의 우체통에 넣어 놓겠습니다. 작성하셔서 다시 우체통에 넣어주시면 제가 회수하겠습니다. 젊은 분들에겐 구글 폼을 송부하여 의견을 듣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마을 발전을 위한 건의사항을 말씀해 주시면 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날, 남편이 가자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마을 통장 이·취임식에서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전쟁 발발 이듬해부터 작성된 마을 회의록과 경비 장부는 박물관에서나 봤던 조선시대 고문서처럼 누런 빛깔을 띠고 있었다. 오래된 서책 특유의 포스가 있었다.
또 건의사항이 있으면 집 우편함에 넣어달라니, 이런 고퀄리티의 서비스는 듣도 보도 못해서 황송했다. 고작 교통비 정도의 봉사료밖에 받지 않는 통장님의 '통장에 임하는 자세'는 열정이 넘치면서도 주민들에게 겸손하셨다. '아 이런 게 말로만 듣던 풀뿌리 민주주의구나.' 교과서에서만 가르쳤던 것을 내 앞에서 보게 되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국이 물난리인 상황, 얄궂은 소식만 들려오지만
"함께 일할 반장님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지금은 도로명 주소로 바뀌면서 반장이 따로 큰 할 일이 없습니다. 통장과 함께 운영위원으로 일한다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일동 인사!"
너댓 분 반장님이 자기소개와 함께 합동 인사를 했다. 집을 지어 팔공산 아래 동네인 이곳에 온지 6년 되었다. 이제야 진정 이 동네 주민이 된 것처럼 뿌듯했다. 동네에 대한 자부심이, 마을에서 바라다 보이는 왕산 꼭대기까지 치솟았다.
전국이 물난리인 상황에서 해외 순방 중인 대통령 관련해서는 얄궂은 소식만 전해져 오고 있다. 남북한 관계는 '이웃집 웬수'처럼 되어 사흘이 멀다 하고 서로를 자극하는 발언과 행동을 주고 받는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언제 방사능 오염수를 방류할지 몰라서 이제나 저제나 불안과 초조에 휩싸여 살고 있다.
'이렇게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 대접을 해주는 자그만 풀뿌리 민주주의가 있구나' 싶었다. 대통령과 정치권 인사들에게 나는 제대로 된 대한민국 국민으로 취급을 받고 있나? 국민 여론이 우리가 뽑은 사람들에게 전달이 되고 있는가? 등등 좋지 않은 의구심만 증폭되는 요즘이다. 내가 직접 뽑지도 않았고, 내 세금으로 그리 큰 돈도 드리지 않는 통장님이다. 그런 통장님으로부터 사람 취급, 주민 대우를 받아 본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는 우리 통의 총무이면서 바로 길 건너에 있는 서촌초등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있는 학부모입니다. 공기 좋은 이 동네의 작은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고 싶어서 이사 왔어요, 근데 학교가 문을 닫는다고 해요. 학부모들 대다수가 폐교에 반대하자 교육청에서 분교로서 열어주겠다고 타협안을 제시해 왔지만, 그건 머지않아 폐교의 수순을 밟는 거라고 해요.
▲ 서촌초등학교 학부모와 지역사회 주민들이 폐교 반대 운동을 하고 있는 서촌초등학교 교사 전경 |
ⓒ 조서람 |
역사가 오랜 학교는 마을의 상징과도 같다. 그런 학교의 교정에 서보면, 그 옛날 학교를 지을 때 마을에서 가장 좋은 터를 골라서 성심껏 지었음이 온 몸으로 느껴진다. 우리 동네의 학교도 그렇다. 연이은 봉우리들이 시야의 넓고 긴 길을 내어주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를 수 있는 터에 지어졌다. 학생들 뿐 아니라 마을의 주민들도 학교 운동장에 서면 깊은 숨을 가슴 가득 들이마시게 된다.
"아! 이런 학교에 우리 손주들이 가방 메고 다녔으면 좋겠구나."
나이 든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생각이 드는 곳이다. 주판알 셈법으로만 계산될 수가 없다. 도시에도 그런 학교 몇 개쯤은 남겨둬야 한다. 숨 쉴 수 있는 해방구 같은 학교는 어떤 아이들에겐 꼭 필요하기도 한데, 그런 학교에서 이뤄지는 교육을 원하는 학부모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 왕산 고려를 건국한 왕건 설화가 서려있는 왕산은 팔공산 줄기에 속해 있으면서 마을을 지켜주는 장군암을 품고 동네를 내려다보고 있다. |
ⓒ 박영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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