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의 심장 멈췄다는 김재규는 영웅도 의인도 아니다”-김대중 육성 회고록〈10〉
김대중 육성 회고록 〈10〉
박정희 정권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정지할 수 있는’ 긴급조치를 남발하고, 유신에 반대하는 소리를 입이라도 뻥긋하면 잡아갔다.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하고, ‘퇴폐’라는 잣대로 대중가요에 ‘금지’ 딱지를 멋대로 붙였다. 권력의 폭거 앞에서 국민들은 가위눌린 채 숨을 죽여야 했다.
나는 민주화를 열망하는 사회 인사 71명의 ‘민주회복국민회의’에 고문으로 참여하며 유신 독재에 항거했고, 대학가에서도 반정부 시위와 집회가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언론은 침묵을 강요당했다. 정권의 통제와 탄압은 언론의 자유를 무력화했다.
신문 백지 광고 탄압
그해 가을 동아일보가 서울대 농대생들의 유신 반대 시위를 기사화했다는 이유로 편집국장 등이 중앙정보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항의하는 동아일보 기자들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했다. 신문·방송의 정부 간섭 배제, 정부 기관원의 언론사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 연행 거부를 외쳤다.
중앙일보 등 전국 31개 신문·방송 기자들이 지지 선언문을 채택하고, 유신 반대 성명·집회·시위를 보도하며 유신 정치의 문제를 제기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정권은 동아일보를 본보기로 삼아 광고를 압박했다. 주요 기업들에 광고를 내지 않겠다는 각서를 강요했다. 신문에 광고가 사라진 ‘백지 광고 사태’가 발생했다.
나는 75년 새해 동아일보 1월 1일자 8면에 ‘언론의 자유를 지키려는 한 시민’이란 익명으로 유료 광고를 냈다.
“언론 자유는 우리의 생명이다. 이것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절대적 의무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다. 동아일보 백지 광고란은 권력의 음모와 오만의 단적인 증거이며, 국민의 알 권리에 대한 정면 도전이다.”
이게 ‘격려 광고’ 1호였다고 한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유료 격려 광고를 내며 빈 광고란을 메워 나갔다. 정권과의 충돌이 격심해지면서 동아일보에서 기자들이 대거 해직됐다.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해 맞섰다.
기자 해직에 막후 중재
비화 하나를 공개하겠다. 나는 김상현 의원과 이태영 변호사에게 동아일보 사주 김상만 당시 사장을 따로 만나도록 막후 중재했다. 대량 해직 사태는 피해야 한다는 의도였다. 김 사장에게 “해직 기자들을 다시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득했다. 김 사장도 셋 빼고는 전원 복직을 받아들이고, 그 셋도 몇 달 뒤 복직을 고려하겠다는 약속을 끌어냈다. 내 딴에는 최선이었는데 뜻밖에도 동아투위에서 화를 냈다.
동아투위: “누가 김대중 보고 우리를 도와 달라고 했나. ‘올 오어 낫씽(All or Nothing)’이다. 전부 복귀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된다.”
DJ 측 메신저: “기자는 신문사 펜대가 무기인데 그걸 놓고 나오면 되겠느냐. 나머지 세 사람의 생활비도 복직한 사람들이 일단 걷어주면 되지 않겠느냐.”
끝내 내 의견을 듣지 않았다. 결국 기자들의 농성장에 경찰이 투입되고 100명이 넘는 사람이 회사에서 쫓겨났다. 강경파 극단주의가 일을 그르친 때가 많다. 세상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일이지만 동아투위에 그런 역사가 있다.
긴급조치 9호…강요된 침묵의 시대
75년 4월 30일, 수도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이 패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를 발표했다.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민 총화를 해치는 행위나 유언비어를 유포시켜 민심을 현혹시키는 행위는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어 ‘국가 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9호를 발동했다. 유신 헌법에 반대·부정·왜곡·개헌 청원 또는 폐기를 주장하거나 찬동·선동, 이런 내용을 보도하거나 표현물을 제작·배포·소지하는 모든 행위를 금했다. 이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하고, 국회의원의 면책특권도 박탈했다. 언론과 집회의 자유가 완전히 사라졌다. 강요된 침묵의 시대가 도래했다.
박정희, ‘DJ 구국선언 참여’에 분노
“도저히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긴조(긴급조치) 세대’라며 체념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내가 행동을 보여야 했다. 명동성당으로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 유언하는 심정으로 말했다.
“국민들 사기가 떨어지고 있습니다. 뭔가 결정적인 일을 해야겠습니다. 제가 감옥에 가겠습니다. 추기경님께 미리 말씀드립니다.”
김 추기경은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손을 꼭 잡았다. 격려의 의미였다. 유신을 비판하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곧바로 감방으로 끌려가는 살벌한 현실을 이심전심으로 알고 있던 터였다.
76년 3·1절을 D-데이로 잡았다. 나는 윤보선 전 대통령, 정일형 의원, 재야인사들과 함께 명동성당 미사 때 ‘3·1 민주 구국선언’을 발표하기로 했다. 그날 이우정 교수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선언문을 읽었다,
“이 민족은 또다시 독재 정권의 쇠사슬에 매이게 되었다. 국가 안보라는 구실 아래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날로 위축되어 가고 언론의 자유와 학원의 자주성은 압살당하고 말았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 위에 서야 한다. 민주주의 만세!”
박정희는 내가 서명자 명단에 포함된 사실을 보고받고 “전부 잡아넣으라”고 노발대발했다고 한다. 나는 ‘정부 전복 선동’ 혐의를 뒤집어쓰고 서울구치소(서대문)에 수감됐다.
껌 포장지에 못으로 쓴 편지
77년 3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이 확정되고 진주교도소에서 복역하게 됐다. 좋은 점도 있었다. 감방에서 책을 많이 읽었다. 세계 명작은 다 읽다시피 했다. ‘내가 이런 걸 모르고 죽을 뻔했다. 감옥에 들어오길 잘했다’고 혼자 중얼거릴 정도였다. 출소한 뒤에도 좋은 책을 읽을 시간이 부족할 때면 ‘감옥에라도 다시 가야 하는 건가’ 하는 충동마저 느꼈다.
나의 투옥에 대한 국제 여론이 나빠지면서 미국·일본의 석방 압력이 커졌다. 박정희 정권은 진주교도소에서 지낸 지 9개월 만에 나를 서울대병원 201호로 이감했다. 인도적 조치라는 명분이었다. 그러나 201호는 병원 속의 특별 감방과 다를 바 없었다. 진주교도소에서는 매일 한 시간씩 운동하며 하늘을 볼 수 있었지만, 병원에서는 금지됐다. 마치 내가 병원에서 편히 지내는 것처럼 선전하려는 속셈에 우롱당한 느낌이었다. “사기극에 놀아나지 않겠다”며 교도소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지만 허사였다.
바깥세상에 뭔가 알리고 싶어 편지를 쓰려 해도 필기구 소지를 막은 탓에 펜이 없었다. 집사람이 작은 못을 하나 구해줬다. 아내가 면회 때 가져온 껌 포장지나 음식을 싸 온 종이에 못으로 글을 썼다. ‘못으로 쓴 편지’는 화장실에 있는 두루마리 화장지의 가운데 구멍 속에 숨겨 뒀다. 집사람이 화장실에 들러 편지를 꺼내 빈 밥그릇 등에 숨겨서 외부로 나갔다.
독재 정권에 조종 울린 부마 항쟁
78년 여름, 병원 감금 상태에서 박정희가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접선거에서 6년 임기의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전체 대의원 2578명 중 반대표는 한 표도 없고, 무효표가 단 한 표였다. 전형적인 독재 정권의 행태였다.
국내외에서 나의 단식 투쟁에 비판이 들끓자 박정희 정권은 병원 감금 1년만인 그해 12월 특별사면으로 석방했다. 2년 10개월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가택 연금이었다. 옆집에 중앙정보부와 경찰이 입주해 24시간 감시했다. 집 주변 초소들에는 경찰 200~300명이 배치됐다. 집 밖에도 못 나가고, 사람도 못 만나는 신세이니 감옥이나 매한가지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민심이 떠나고 있었다. 79년 10월 ‘부마(釜馬) 민주 항쟁’을 통해 민중의 불만이 폭발했다. 부산에서 대규모 대학생 시위가 일어났고, 시민이 합세해 정치 탄압 중단과 유신 정권 타도를 외쳤다. 박정희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했다. 반정부 시위는 이웃 도시 마산으로 번져 노동자와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섰다.
부마사태는 유신 체제에 울리는 조종(弔鐘)이었다.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을 독재 정권 자기들만 모르고 있었다.
불안히 다가온 ‘서울의 봄’
최악의 위기가 드리워지던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튿날 새벽 4시쯤 미국에서 지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간밤에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했답니다.” 61년 5·16 쿠데타 이후 계속된 박정희의 18년 장기 독재가 막을 내렸다.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말처럼 “야수의 심정”으로 박정희에게 총을 쏘았고 “유신의 심장”은 멈췄다.
나는 김재규를 ‘영웅’ ‘의인’으로 보는 시각에 반대한다. “4·19처럼 민중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순간이 다가왔는데, 민중이 독재자를 응징하지 않고 부하에게 살해당한 일은 우리 민주주의에 이롭지 않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80년 서울의 봄’은 불안했다.
※ 더중앙플러스에서 연재 중인 김대중 육성 회고록 전문(https://www.joongang.co.kr/article/25168153)을 보실 수 있습니다.
11회 〈1980년 불안한 ‘서울의 봄’〉이 7월 25일 이어집니다.
고대훈·강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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