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적 지원이나 '살상무기' 못잖다…尹 묘수, 우크라 지뢰제거
지난 15일(현지시간)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우크라이나를 방문한 김건희 여사가 키이우의 아동권리보호센터에서 만난 한 어린이는 김 여사의 손목에 스티커를 하나 붙여줬다. 지뢰를 탐지하는 강아지가 놀이터에서 어린 아이들을 이끌고 가는 그림이었다는 게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의 설명이다. 러시아군이 퇴각하며 아동 이용 시설에까지 빼곡하게 지뢰를 매설, 어린이를 비롯한 민간인들도 언제든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는 잔인한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윤 대통령이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지뢰 탐지기·제거기의 지원 확대를 약속한 것도 이런 배경이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 우크라이나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장애물 역시 지뢰밭이기 때문이다. 지뢰 제거 지원이 인도적 지원인 동시에 살상 무기 못지않은 전세 역전 효과를 꾀할 수 있어 양국 모두에게 일종의 ‘묘수’가 될 수 있다.
지뢰에 막힌 반격…“수요 절박”
대통령실은 1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와의 정상회담 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가진 언론 브리핑에서 지뢰 탐지기·제거기 지원은 우크라이나 측의 요청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이들 무기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수요가 절박하리만큼 컸다”는 게 김태효 차장의 설명이다.
러시아 군이 살포한 지뢰는 민간 피해를 야기할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진군에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NYT)가 최근 우크라이나 군 장병들을 인터뷰했더니 이들은 지난 5주 간 반격이 지지부진했던 이유로 지뢰를 공통적으로 꼽았다. ‘마녀’ ‘잎사귀’ 등 수십 가지 이름이 붙은 지뢰가 광범위하게 펴졌다는 것이다. 러시아 군이 주요 거점 앞 5∼16㎞ 지역에 대전차ㆍ대인 지뢰를 빼곡하게 심어놨다는 증언도 나왔다.
지난 6월 반격이 본격화할 무렵 미국이 제공한 브래들리 장갑차, 독일산 레오파르트 전차 등 우크라이나 군의 무기손실률이 20%에 이른 것도 지뢰 때문으로 분석된다. 자포리자에 투입된 주력 부대인 제47기계화여단의 경우 99대 브래들리 중 28대가 지뢰로 무력화됐다고 한다. 이에 우크라이나 군은 미사일과 포를 앞세우는 식으로 전술을 바꿔 무기손실률을 10%로 낮췄지만, 진격 속도는 크게 떨어졌다.
NYT는 2014년 아프가니스탄·체첸과 전쟁 때부터 지뢰가 러시아 군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했다. 이때 지뢰로 이득을 본 경험을 살려 전쟁이 이뤄지는 동안 우크라이나에 꾸준히 지뢰를 뿌리고 있다는 것이다. 데니스 슈미할 우크라이나 총리는 지난 1월 언론 인터뷰에서 “전쟁 후 우크라이나에 25만㎢ 규모의 지뢰 지대가 생겼다”며 “이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밝혔다.
살상무기 이상 효과 기대도
우크라이나가 한국에 지뢰 제거 지원을 콕 집어 요청한 건 한국이 이 분야에서 강점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6·25전쟁에 이어 분단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각종 유실지뢰는 한국 군 평시 작전에서 여전한 위험요소다. 신형 지뢰탐지기 PRS-20K, 장애물개척전차 K600 등이 국내 기술로 개발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슈미할 총리 역시 “지뢰 제거 작업에서도 풍부한 경험과 기술, 장비 등을 갖춘 한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우크라이나가 지뢰 탐지 및 제거에 속도를 내게 된다면 이는 살상무기 직접 지원 이상의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분석도 그래서 나온다. 미국 주도의 통합억제(integrated deterrence) 전략에 동참하기로 한 정부가 향후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받을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지뢰 제거 지원은 우크라이나 군의 전투력 제고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면서도 인도적 성격의 비살상 군수품만 지원한다는 정부의 기존 원칙과 명분을 유지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실제 양국 정상이 합의해 발표한 우크라이나 지원책 ‘평화 연대 이니셔티브’는 안보·인도·재건 지원 분야 각 3가지씩으로 구성됐는데, 지뢰탐지기는 인도 분야에 포함됐다.
장애물개척전차 지원도 가시권
이미 물꼬도 트였다. 정부는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요청에 따라 지난주 군 수송기를 띄워 휴대용 지뢰탐지기 등을 보냈다. 당시엔 한국 군 보유 상황을 고려해 신형(PRS-20K)이 아닌 구형 탐지기를 보냈다고 한다.
정부는 향후 PRS-20K는 물론 장애물개척전차 K600 지원이 가능한지도 들여다볼 계획이다. 정부는 당장 K600 대신 다목적 굴착기를 우선 지원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양국은 또 이번 정상회담에서 방위산업 협력 방안도 중장기 과제로 구상하기로 했다. 이를 놓고 일각에선 우크라이나에 ‘K 방산’의 기술 이전이나 현지 생산 등이 이뤄지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정부 관계자는 “양국 방산 협력은 전쟁 이후를 염두에 둔 사안”이라며 “우크라이나가 인접국과 ‘힘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면 이 같은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취지로 이해한다”고 말했다.
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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