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대외 리스크에 ‘탈공직’ 무드… 공직자 기업행 러시
산업통상자원부에서 근무하던 기술직 공무원 A씨는 지난 4월에 퇴직했다. 지난달에 현대자동차에 상무로 입사했다. 9등급 외무공무원으로 외교부에서 일하던 B씨 역시 4월에 공직을 관두고 지난달 현대차 상무로 자리를 옮겼다. 관세청 3급 공무원 C씨는 지난 5월에 공직을 나와 이번 달에 삼성전자에 상무로 취업했다.
모두 공직을 그만둔 지 두 달 만에 기업에 갔다. 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공직자 취업심사’ 자료를 보면 공직을 그만두고 얼마 안 돼 기업에 취업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한 정부 부처 관계자는 17일 “공직자는 채용회사에 이력서를 올릴 수 없다. 바로 기업으로 옮길 수 있는 건 대부분 현직에 있을 때 ‘알음알음’ 제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기업이 현직 공무원을 끌어오는 공식 루트는 있을 수가 없다. 공직자 사회에서 후배가 퇴직 의사를 밝히면 선배가 기업에 연결해주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기업과 공직 사이에 보이지 않는 취업 연결고리가 있다는 얘기다.
기업은 최근 들어 더 적극적으로 공무원에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기업이 대응해야 할 대외 리스크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터져 나오고 있어서다. 미국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유럽연합(EU)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핵심원자재법(CRMA) 등 각국 정부가 펼치는 자국 우선주의 정책도 기업엔 위기다. 이런 문제는 기업이 자체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난해 글로벌 3위 완성차그룹으로 도약하면서 대외 리스크 관리의 중요성이 더 커졌다. 자동차 산업의 패러다임이 내연기관차에서 전기차로 전환하는 시기에 이제는 한국 정부뿐만 아니라 외국 정부와 협력해야 하는 상황도 빈번해졌다. 현대차그룹이 최근 주미대사관, 유엔대표부 등을 거쳤던 김일범 전 대통령 의전비서관을 영입하며 글로벌 대관조직을 정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삼성전자도 비슷한 상황이다. 미·중 반도체 패권 경쟁이 격화되는 상황은 삼성 입장에서는 고민거리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권혁우 전 산자부 미주통상과장과 유명희 전 산자부 통상교섭본부장 등을 불렀다. 해외 대관 업무를 맡긴 것으로 알려졌다.
LG는 올해 1~6월에 공무원 9명과 취업 절차를 밟았다. 이미 지난해(8명)보다 많은 공무원에 손을 내밀었다. 한화와 롯데도 각각 10명, 6명을 영입해 지난해(한화 13명, 롯데 6명) 수준에 근접했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부처 공직자 출신은 시야가 넓고 다양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에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크다”고 평가했다. 공무원 취업심사의 ‘단골 4개 부처’인 경찰청, 국방부, 금융감독원, 대검찰청 공무원의 기업행도 여전하다. 경찰이나 군인은 퇴직 후 민간 기업에서 자문을 하거나 검찰 출신은 로펌 변호사로 옮기는 경우가 많다.
기업의 공직자 영입이 증가한 데는 공무원의 ‘탈공직’ 현상과도 맞물려 있다. 정부 부처 한 관계자는 “국장은커녕 과장급에서부터 승진 경쟁이 치열하다. 과장을 달지 못하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손을 내미는 기업에 시선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과거엔 기업이 주로 고위 공직자 출신을 데려와 고문이나 사외이사에 앉혔었다. 하지만 요즘은 ‘실무형 공무원’에 대한 선호도가 커진 것도 달라진 점이다. 기업은 당장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직원이 필요하고 공직 사회에서는 ‘허리급’이 조직을 떠나려고 하는 상황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정책 생산을 주도하지 못하고 대통령실이나 정치권이 하달한 업무만 수행하는 수동적 관료사회 분위기도 ‘탈공직’ 현상의 요인이다. 한 경제부처 과장은 “내게도 분명히 사명감이 공직 생활의 원동력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서지 말라’는 분위기 속에서 그런 건 사라진 지 오래”라고 자조했다.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물갈이’가 되기 때문에 명예와 보람을 찾기 어려울 것”이라며 “관료제 운영이 잘못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공직자의 기업행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는 관점도 있다. 박석희 가톨릭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직자의 기업행은) 공직과 민간의 협력 관계를 증진할 수 있을 것”이라며 “공직에서의 경력과 경험을 토대로 기업에서 새로운 비즈니스를 창출하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새로운 협력적 패러다임을 만들 수 있는 측면도 있다”고 분석했다.
이용상 한명오 기자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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