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흑해곡물협정 종료…약속 이행되면 복귀"
러시아가 흑해곡물협정을 종료하겠다고 17일(현지시간) 발표했다. 이 협정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 중에도 흑해를 통한 곡물 수출 안전을 보장하는 내용이다. 협정 기한이 지난 5월 17일 세 번째로 연장된 뒤 이날 2개월의 기한이 만료될 예정이었다. 러시아의 이번 결정으로 빈곤국과 개발도상국 등의 식량난이 가중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다만, 러시아 당국은 자국의 요구가 수용될 경우 협정에 즉각 복귀할 것이라며 협상의 여지를 남겼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이날 언론에 "흑해곡물협정은 오늘부터 효력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러시아가 앞서 밝힌 대로 협정의 데드라인은 17일(오늘)"이라며 "불행하게도 러시아 관련 사항이 아직 이행되지 않았고, 따라서 협정이 종료됐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페스코프 대변인은 "러시아의 관련 사항이 이행되는 즉시 러시아는 협정 이행에 복귀할 것"이라며 협상 가능성을 열어뒀다. 러시아는 과거 협정 기한 연장에 회의적인 태도를 취하다가 막판에 동의한 적 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길은 열어주면서 자국 농산물과 비료의 수출은 제재받는다는 점을 협정 연장 반대 이유로 제시한다. 앞서 지난 15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시릴 라마포사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제재 차별뿐만 아니라, 우크라이나 곡물이 저개발국에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이번 발표를 하기에 앞서 이날 크림대교가 파손되는 사건이 발생했고, 러시아는 이번 공격의 배후로 우크라이나를 지목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선 러시아의 이번 결정이 이 공격에 대한 보복성 성격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실제로 러시아는 지난해 크림반도가 공격을 받자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이 협정 참여를 중단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페스코프 대변인은 이번 협정 종료 결정은 크림대교가 공격받은 것과는 무관하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7월 유엔과 튀르키예의 중재로 흑해에서 곡물 수출선의 안전을 보장하는 이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으로 우크라이나는 그간 비교적 안정적으로 곡물을 수출할 수 있었다.
중동, 아프리카 등은 우크라이나산 곡물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유엔 자료에 따르면 이 협정이 발효된 이후 우크라이나는 밀, 옥수수 등 3280만t의 식량을 이들 나라에 수출했다. 흑해곡물협정 덕에 전쟁 와중에서도 최악의 식량난은 막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날 러시아의 협정 종료 결정으로 전 세계의 곡물 가격이 상승하고 식량난이 심화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전 세계적인 기후 위기와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대다수의 국가가 이미 급격한 물가 상승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 등 5개 유엔 산하 기구들이 지난 12일 펴낸 식량 안보·영양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식량 사정은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굶주림에 직면한 세계 인구는 7억3500만 명이며, 식량을 제때 공급받지 못하는 인구는 24억 명에 달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은 이날 러시아의 협정 종료 결정을 규탄했다. 그러면서 "EU는 전 세계 취약층을 위한 식량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흑해곡물협정을 중재해 온 튀르키예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이 협상 지속을 원한다고 믿는다"며 "8월에 직접 만나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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