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이 본 갑신정변 '우정국 현장'
[김삼웅 기자]
▲ 구한말 조선에서 벼슬을 한 뮐렌도르프(한국식 이름으로는 목인덕). |
갑신정변 당시 우정국 사건현장에 있었던 독일인 목인덕(穆麟德), 본명 묄렌도르프(1847~1901)의 부인이 쓴 수기의 관련 부분이다.
12월 4일에 우정국장 홍영식이 이 우정국의 개설을 축하하는 대연회를 베풀었다. 홍과 그의 친구 김옥균·박영효 및 서광범은 친일당의 지도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밖에 참석한 사람으로는 미국 공사 푸트, 그의 비서 스커더 그리고 그의 통역 윤치호, 영국 총영사 아스톤, 일본공관 서기관 도촌(島村)과 통역관, 중국대표 진수상(陳樹棠)과 그 간사 담경요, 남편 그리고 세 사람의 장군 즉 민영익·한규직·이조연 그리고 두 사람의 영어를 할 줄 아는 한인이 통역으로 나와 있었다.
독일 대표는 와병으로 못 나왔고 죽첨(竹添-일본 공사)도 병이라는 이유로 불참했다. 식사는 7시부터 시작되었다. 공기는 퍽 무거웠고 회화는 침체되었었다. 남편과 민(영익)이 가장 쾌활하게 지껄였다. 식사중에 김옥균이 여러 차례 식탁을 떠나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인 10시 가량 되어서 갑자기 "불이야!"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장군들이 일어났으나 민이 혼자서 나가보겠다고 결심하자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불은 전동에서 났다는 말이 돌자, 남편은 민을 따라 회장을 나왔다. 그러나 아직 마당에도 채 내려서기 전에 민이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비틀거리면서 "사람죽인다!"하고 소리치면서 남편 팔에 쓰러졌다. 정체불명의 한 사나이가 칼로 찔러서 무서운 상처를 내게 했던 것이다.
남편은 민을 회장으로 끌고 들어갔는데 남편도 피가 듬뿍 묻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모양은 흉측하기 짝이 없었다. 모두들 놀라서 "민중이 일어섰다. 위험하다"라고 모두들 외쳤다. 순식간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남편과 민 그리고 그의 충실한 호위병 한 사람뿐이 되었다. 남편은 민을 임시통변으로 싸메어 주었다. 다른 하인들이 부상의 소식을 전동으로 전해주어서 한 시간여 후에는 당소의(唐紹儀)·아르누스·크니프로 그리고 마부가 무장해 가지고 뛰어왔고, 가마를 하나 갖고 와서 민을 전동의 우리집으로 싣고 왔는데, 곧 미국인 선교사 의사인 알렌을 불러다가 민을 붕대 감고 치료했었다.
그날 밤은 무서운 밤이었다. 그러나 민중은 전혀 동요되지 않고 폭동이 기도되지 않았다는 것이 알려지고, 다만 민이 개별적으로 습격되었음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러나 또한 불량배의 일단이 죽첨과 200명의 일본 군대와 함께 왕궁을 점령하고 정부 수뇌들을 살해했다는 확인된 소문이 밤 사이에 전동으로 날라들어왔다.
반란자들은 우정국으로부터 왕궁으로 달려가서 왕에게 고하기를 폭동이 일어났으니 왕은 피신하고 일본인들의 구원을 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왕이 이를 듣지 않았기 때문에 모반자들은 왕의 재가 없이 김옥균이 쓴 <일사내위(日使來衛)>라는 수찰을 일본공관으로 죽첨에게 보내었다. 죽첨은 병이라는 이유로 연석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그는 준비되어 있었고 군인들은 출격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 내시가 왕에게 민중은 전혀 평온하여 폭동은 일본인들이 일으켰다고 귓속말로 일러바치자 그 내시는 왕의 면전에서 칼에 맞아 죽었다. 그리고서는 영향력 있는 고관들을 개별적으로 왕궁으로 불러다가 다 살해하였다. 젊은 민이 최초의 희생자가 되고 이어서 민의 아버지 (민승호)·민태호·민영목·이조연 장군·윤태준 장군·한규식 장군 그리고 왕의 종형이고 민중의 다시없는 경애를 받던 조영하가 쓰러졌다.
난도들은 민과 남편을 내버렸었는데 그것은 이들이 심한 부상을 입었거나 죽은 줄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조영하는 소문을 듣자마자 전동으로 남편을 찾아와서 새벽 두 시까지 여기서 머물렀는데, 그리고서는 왕의 운명이 걱정되어서 더 머물 수가 없어서 왕궁으로 달려갔던 것이다.
벌써 4시가 되어 조영하가 살해되었다는 처참한 소식을 남편의 한인 통역이 가지고 왔다. 이것은 특히 유감된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남편에게는 심대한 충격을 주었다. 조는 지극히 명석한 두뇌와 고귀한 인격자였던 것이다.
이미 1883년 3월에는 조는 죽첨과의 불화 때문에 통리아문에서 밀려났는데 오직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민중의 경애를 무척 받았다. 1880년의 가혹한 천주교 박해시에 그는 수백명의 신도를 자기 궁에 숨겨줌으로써 목숨을 건져주었던 것이다. 통리아문의 관리들 가운에서는 3명만이 살아남았다. 독판 김홍집과 김영익 그리고 남편이다. 김홍집은 남편이 적시에 경고해 주었던 것이다. 죽은 김은 이미 왕궁으로 갔었는데 남편의 경고를 받아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빠져나와서 서울 밖으로 도망했었다. 민과 남편은 죽은 줄로 알려졌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주석 13)
주석
13> <역주 목인덕의 수기>, 고병익, <동아시아의 전통과 근대사>, 339~341쪽, 삼지원,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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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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