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다섯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공부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유신준 기자]
[기사 수정 : 22일 오전 9시 55분]
드럼을 시작한 건 우연이었다. 외딴 집에 사는 친구 집에 드럼이 항상 놀고 있었다. 저걸 한번 재활용해 봐? 때마침 군청 평생학습에서 트로트 드럼 교실이 생겼다. 찬스잖아!
▲ 화려한 버스킹은 피땀어린 연습으로 완성되는 무대다 |
ⓒ 유신준 |
등록을 하려니 하루 만에 인원이 다 찼단다. 할 수 없이 대기자 명단에 올려놨다. 드럼과 인연이 있다면 어떻게든 되겠지. 운에 맡기는 수밖에... 얼마 안 있어 담당자한테서 추가 인원을 받아 들이기로 했다는 전화가 왔다. 반가웠다.
가까스로 등록은 했는데 문제가 또 생겼다. 일본에서도 전화가 왔다. 정원사 공부를 하려고 아는 분에게 적당한 사부를 부탁해 놨는데 건너와 보란다. 이걸 어쩌나. 먹고 사는 게 우선 순위니 정원사 공부를 위해 일단 건너가는 수밖에.
▲ 드럼은 즐겁다. 감정발산 효과가 대단히 크다. |
ⓒ 유신준 |
정원사 연수를 다녀와 보니 이미 강좌가 4회째 진행중이었다. 담당자에게 연락해봤다. 3번을 무단 결석하면 자동제적이란다. 그래도 선생님께 한 번만 사정해 보라고 간청했다. 받아주기로 했다는 연락이 왔다. 아하, 운이 따르는 구나.
▲ 드넓은 자연과 어우러진 드럼소리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
ⓒ 유신준 |
드럼 선생님은 목사님이었다. 교회에서도 드럼연주를 많이 하니까, 연구가 깊어져서 가르치는 일도 하시나 보다 생각했다. 검색해보니 유튜브에 펀드럼이라는 사이트도 운영하고 있었다.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해서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부지런한 목사님이었다.
수강생은 의외로 남자보다 여자가 많았다. 남자들도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였다. 하는 일도 다르고 개성이 뚜렷했다. 개성도 개성 나름. 관심 분야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이면 쉬 섞이고 가까워지는 법이다. 우리는 만나면 즐거웠다.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잘 어울려 다녔다.
드럼의 매력에 빠져 하루종일 드럼만 연습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럴 만 했다. 뭐든 좋아하게 되면 어쩔 수 없는 거다. 연애 해봤나? 하루종일 그 사람 생각만 나던 거 기억나나? 드럼도 그런 거다. 그 정도면 이미 드럼 호르몬이 온 몸을 돌고 있는 상태지. 두드리는 매력에 흠씬 빠져버린 거야. 애초 그놈의 드럼 소리에 홀려 당신의 시끄러운 운명이 시작된 거니까.
▲ 버스킹은 드럼연습을 위한 이벤트였다 |
ⓒ 유신준 |
선생님이 나보다 앞서 시작한 사람을 소개해줬다. 일단 기본 스트로크를 집중적으로 연습하라 했다. '쿵치따치'만 연습하면 간단한 건 다 커버할 수 있다며. 첫날 수업은 뭐가 뭔지 모르고 지나갔다. 악보집을 사고 인터넷으로 스틱과 연습패드를 주문했다. 내 드럼 인생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악보를 봤다. 오선지에 그린 콩나물 대가리는 똑같은데 의미가 달랐다. 음의 높낮이를 표시하는 게 아니고 해당되는 악기를 치라는 뜻이었다. 그렇지. 드럼 소리는 높낮이가 없을 테니까. 악보를 익히는 건 어렵지만 드럼을 배우는 폼나는 과정이다. 드럼 치는 사람이 악보 공부는 기본 아닌가. 스스로를 다독였다.
얼마 안 있어 야외 수업을 겸한 버스킹이 있었다. 나는 아직 악기가 없으니 친구 집에서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박자만 맞춰도 신이 났다. 친구도 드럼 소리를 들으며 즐거워했다. 즐거워 하는 걸 보니 드럼 시작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신나고 남이 즐겁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나?
버스킹 곡으로 악보 첫머리에 있는 고향의 봄을 선택했다. 손발이 따로 놀아야 연주가 가능한데 통제가 불가능하다.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래도 연습만이 살길이다.
틀린 곳을 체크하며 집중적으로 반복했다. 버스킹의 꽃은 무대에서 연주하는 일이겠으나, 연습하며 준비하는 데도 의미가 크다는 걸 깨달았다. 화려한 버스킹은 피땀어린 연습으로 완성되는 무대였다. 우아한 백조의 수면 아래 발처럼.
버스킹 날 소풍가는 기분으로 모임 장소에 갔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나? 틀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같은 건 애초 없었다. 시작한 지 얼마나 됐다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하면 되지. 연주 실력은 형편 없었고 사진만 전문 드러머 뺨치게 나왔다.
야외는 실내에서 두드리는 드럼 소리와 달랐다. 어쩌면 드럼은 야외연주를 위한 악기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내에서 사방 벽에 가로 막혀 다하지 못한 자신의 소리를 한껏 높였다. 드넓은 자연과 어우러진 드럼 소리는 또 다른 매력이었다.
버스킹은 드럼 연습을 위한 이벤트였다. 그만큼 선생님은 가르치는데 열심이었다. 수업도 한 주에 한 곡 정도를 기준으로 진행했다. 반드시 전 주에 배운 것을 앞에 나가 연주시켰다. 연습 안 하고 배길 수가 없게 만든 시스템이었다. 그는 빡센 시스템 속에서도 유머와 부드러움을 잃지 않았다. 황홀한 드럼의 세계로 안내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 이런 종류의 위험한(?) 물건은 설치 조건이 맞아야만 살 수 있는 거다 |
ⓒ 유신준 |
어느 날 무심코 들렀던 리사이클샵에 어쿠스틱 드럼이 보였다. 눈이 환해졌다. 일순, 세상 모든 게 사라지고 오로지 그 드럼만 보였다. 이건 운명이다! 신이 보낸 선물이다! 내친 김에 의자에 앉아 아는 리듬을 두드려봤다. 쿵치따치 쿵치따치 뚜두두두 두둥 챙! 엄청난 소리였다. 스네어도 탐도 심벌까지도 소리가 훌륭했다. 잠시 두드리고 있는 사이 직원이 헐레벌떡 쫒아왔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드럼 세트는 겉모양이 좀 낡긴 했으나 연습에는 전혀 지장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드럼을 사야 할 결정적 이유가 또 있었다. 택에 붙어있는 가격이 9900엔이었다. 10만원도 안 되는 가격에 이만한 드럼세트라니! 단번에 감이 왔다. 이걸 반드시, 기필코 사야 한다.
사고 싶다고 살 수 있나. 이런 종류의 위험한(?) 물건은 설치 조건이 맞아야만 살 수 있는 거였다. 다행히 내가 세 사는 곳은 창고 이층의 독채이긴 하다. 앞쪽으로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럭비 사무실 건물이 있고 뒷쪽은 감나무 밭이다. 옆 집이 좀 신경쓰이기는 한데 차고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아전인수식으로 판단해서 조건이 좀 괜찮다는 정도였다. 주택가의 드럼소리는 사정불문 폭력행위가 된다. 더구나 이 사람들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사는 걸 인생 목표로 삼는 사람들 아니던가.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는 거다. 드럼치다가 한방에 국외 추방될 수도 있다. 설치를 하려면 어떻게든 소리를 줄이는 게 급선무였다.
다행히 아래층 잡동사니 창고에 드럼세트를 들여놓을 공간이 있었다. 창고면 어떠랴 어디든 연습할 수 있으면 고마운 거지. 일단 저질러 놓고 보기로 했다(드럼공부도 일단 저질렀잖아!). 맘씨 좋은 주인 할배에게 부탁해서 드럼세트를 승용차에 싣고 와 버렸다.
창고 안에 설치하고 소리를 줄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내진패드라는 게 있었다. 붙여 봤더니 과연 효과가 있었다. 오히려 소리가 너무 줄어 떨판이 찢어진 매미 울음소리가 났다. 이걸 무슨 재미로 치나. 소리도 안 나는 게 무슨 드럼이야!! 그래도 쫒겨나는 것보단 낫지. 오후에만 소리를 죽여가며 살살 연습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 드럼을 치고 싶냐고 묻고 싶으실 거다. 얼마나 치고 싶으면 이렇게까지 하겠냐고 되묻고 싶다. 짧은 인생에서 가슴 뛰는 일이 어디 흔하더냐. 간절히 노력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되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닌가.
중국의 어느 성현도 일찌감치 파악했었다. 그대 비단 옷 아끼지 말고, 젊은 날 꽃시절을 아끼게나. 꺾을 만한 꽃 있으면 당장 꺾으시게. 꽃필 때 기다리다 빈가지 꺾지 말고.
내 짧은 드럼 인생 일단 여기까지 왔다. 즐겁게 살기 위한 노력은 아직 진행 중이다. 드럼은 즐겁다. 감정발산 효과가 대단히 크다. 그래서 두드리면 신나는 거다. 사는게 우울하면 드럼을 배우시라. 드럼 소리에 실어 다 날려 보내시라. 스틱을 잡으면 삶이 즐거워지나니... 뒤돌아보면 드럼은 내 예순다섯 인생에서 가장 신나는 공부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제20회 평생학습대상에 응모한 글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최은순 징역 1년 법정구속... "죽어버리겠다" 고함치다 끌려가
- "문 정부가 4대강 보 해체해 충남·전라 물난리" 주장 '새빨간 거짓'
- 대한민국 모든 학교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 행복청 거짓말했나..."미호강 터지기 50분 전, 중장비 없이 6명 삽질"
- 페미니스트의 체중 감량,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 김건희 여사에게 경고한 <동아>, '윤 정부 큰일났다'는 <중앙>
- 한 초등교사의 흐느낌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스러웠으면..."
- 최저임금위가 본래 목적을 잊지 않길 바란다
- [오마이포토2023] 법정구속 후 호송차 타는 대통령 장모 최은순씨
- 6년 전 터진 제방 또 터지고, 역류한 수문은 농지에 물폭탄 쏟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