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복 27시간' 尹은 왜 키이우 갔나..."재건사업 한국 몫만 66조"
전날 우크라이나를 전격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대통령실이 16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에 지뢰 탐지기 지원을 포함한 안전 장비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를 포함해 총 9개 우크라이나 지원·협력 패키지를 마련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제1차장은 이날 오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 이후 안보 분야 3가지, 인도 분야 3가지, 재건 분야 3가지 등 9개 패키지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전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뒤 공동 언론발표에서 ‘우크라이나 평화 연대 이니셔티브’ 추진 방침을 밝혔다. 안보·인도·재건 지원 분야에서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이었는데, 대통령실이 이를 9개 패키지로 세분화한 것이다.
김 차장은 먼저 안보 지원과 관련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발표한 평화공식(Peace formula)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준비하는데 긴밀히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종식을 위한 러시아군 철수와 정의 회복 등 10개 항목을 담은 평화공식과 정상회의 개최를 국제사회에 요구하고 있다. 이를 한국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협력하겠다는 뜻이다. 김 차장은 또 군수물자 지원 확대 및 중장기 한-우크라이나 방위사업 협력 구상, 식량·에너지 안보 협력 확대도 언급했다. 다만 살상무기 지원 계획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인도 지원에 있어선 “지뢰 탐지기·제거기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수요가 절박하리만큼 커 지원을 확대하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재정 지원은 우크라이나의 전쟁 수행 능력을 지원하기 위해 세계은행·국제사회와 협력해 적절한 수준에서 지원하기로 했으며, 아동를 위한 심리·정신 치료도 지원한다.
재건 지원 분야에선 지난 5월 가서명한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기본 협정과 무상 원조(ODA) 지원을 언급했다. 김 차장은 “특히 이번에 우크라이나는 2차전지, 전기차 생산, 금속 제련 분야까지 직접 투자를 요청했다”며 장기적으로는 광산·공급망 분야, 기본 인프라와 관련된 자동차 분야, 차세대 배터리 분야, 통신 디지털 분야 등에서 한국 기업들의 투자를 희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외에도 교육 프로그램 지원 및 미래 세대를 위한 ‘윤석열-젤렌스키 장학금’ 신설도 언급했다.
이번 우크라이나 전격 방문은 윤 대통령의 결단으로 이뤄졌다. 김 차장은 “윤 대통령이 몸소 순방 현장에서 피부로 느끼면서 우크라이나 현지에서 무엇이 필요하고, 우리와 무엇을 협력할 수 있는지를 정확히 식별할 수 있었다”며 “그저께(14일) 저녁 그 시간이 아니면 우크라이나를 방문할 기회는 전쟁 끝날 때까지 없을 것처럼 보여 결심했다”고 전했다. 나토 정상회의 참석과 폴란드에서의 재건 협력 논의를 통해 고심 끝에 우크라이나 직접 방문을 윤 대통령이 결정했다는 취지다. 그는 “윤석열 정부의 가치 외교, 책임 외교 실천 기조가 아시아를 넘어 유럽, 글로벌 현안에 대해 입체적으로 긴밀히 연계한다는 명분도 작용했다”고 부연했다.
우크라이나 국경으로 넘나드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김 차장에 따르면 지난 14일 저녁 윤 대통령과 부인 김건희 여사는 최소한의 참모만들과 함께 항공기 편, 육로 편, 기차 편을 섞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를 향했다. 가는데 14시간, 폴란드로 돌아오는데 13시간이 걸렸다. 왕복 이동시간만 27시간이다. 반면에 우크라이나 현지 체류 시간은 11시간 밖에 안 됐다. 김 차장은 “체류 시간에 비해 이동한 시간이 몇 배로 험난했음에도 여러 요소를 고려해 어려운 결정을 했다고 이해해 달라”고 말했다. 한국 대통령으로 파병지가 아닌 전시국가를 직접 방문하는 첫 사례였다.
갑작스러운 방문이었지만, 순방 도중 윤 대통령의 발언 등을 통해 어느정도 예상됐던 측면도 있다. 윤 대통령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국제 사회의 연대에 동참하겠다면서 “나토의 우크라이나 신탁기금에 참여하겠다”고 밝혔다. 유럽 13개국 정상들과의 양자 회담 때도 "우크라이나가 조속히 평화를 회복할 수 있도록 긴밀히 협력하자"고 했다. 윤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최인접국인 폴란드가 우크라이나 재건의 허브가 될 것이라는 데 착안해,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에서도 재건 협력을 핵심 의제로 다뤘다. 우크라이나 방문은 그 연장선에 있었다.
윤 대통령의 결단은 한국 기업들의 전후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 진출을 돕기 위한 행보로 분석된다. '제2의 마셜플랜'에 비견되는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은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을 포함한 세계 각국이 물밑 각축을 벌이고 있다. 사업 규모가 장기적으로 2000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한국의 민간·공공기관 참여 규모는 최소 520억 달러(약 66조원)수준으로 대통령실은 예측한다.
앞서 윤 대통령은 전날 우크라이나 도착 직후 수도 키이우 인근 부차시 학살 현장과 민간인 주거지역으로 미사일 공격이 집중됐던 이르핀시를 돌아봤다. 이어 전사자 추모의 벽을 찾아 헌화한 후 대통령 관저인 마린스키 궁에서 볼로디미르젤렌스키 대통령과 110분 동안 정상회담을 진행했다. 윤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공동 언론발표에서 “‘생즉사 사즉생(生則死 死則生: 살려고 하면 죽고, 죽으려고 나아가면 산다)의 정신으로 우리가 강력히 연대해 함께 싸워나간다면 분명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대통령으로서 죽음을 겁낼 권리가 없다”고 한 말을 언급한 뒤 한 말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의 정신을 현재 전시 중인 우크라이나에 적용하면서, 자유와 연대라는 두 핵심 가치에 대한 수호 의지를 밝힌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러시아의 불법 침략” 때문으로 규정한 윤 대통령은 대한민국도 “70여 년 전 공산 전체주의 세력의 불법 침략으로 국가 존립이 위협받았지만,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기적적으로 승리했다”고 말했다. 또 한강의 기적에 빗대 ‘드니프로강의 기적’을 언급하며 “대한민국은 우크라이나의 자유와 평화, 번영을 가꾸는 동반자가 될 것이며, 나아가 우크라이나와 함께 세계의 자유, 평화, 번영에 함께 기여하는 믿음직한 파트너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외교 분야에 정통한 여권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방문에 대해 “명분과 이념적으로는 자유· 연대에 방점을 찍고, 경제적으로는 재건 사업에 주춧돌을 놓겠다는 윤 대통령의 정교한 외교 전략이 깔려 있다"고 분석했다.
◇민주당 "러시아를 적대국 만든 것"=더불어민주당은 비판을 쏟아냈다. 권칠승 당 수석대변인은 16일 브리핑에서 “윤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생즉사 사즉생의 정신’까지 언급하며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지원 가능성을 더욱 명확히 했다”며 “윤 대통령이 직접 전쟁터까지 방문했으니 의도적으로 러시아를 적대국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이번 일로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는 북한이 무장을 강화하는 등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스럽다”고 했다. 김태년 의원도 “전쟁의 불씨를 한반도로 끌고 오는 위험천만한 짓”이라며 “휴전국인 대한민국이 러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불사하겠단 선포나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바르샤바=권호 기자, 현일훈 기자 kw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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