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진정성과 개소리의 시대

천지우 2023. 7. 17.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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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이 있다.

미국의 저명한 도덕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가 요즘 사회에 만연한 개소리의 본질에 대해 논한, 짧지만 신랄한 글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사실들은 특별히 단단한 것도, 회의주의적 해체에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사실 붙잡기 어려울 정도로 실체가 없다.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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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우 정치부 차장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이 있다. 제목도 ‘개소리에 대하여(On Bullshit)’다. 장난스럽거나 위악을 부리는 내용일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의 저명한 도덕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가 요즘 사회에 만연한 개소리의 본질에 대해 논한, 짧지만 신랄한 글이다.

개소리는 기만적인 부정확한 진술이며, 어떤 경우에도 공들여 만든 건 아니다. 거짓말과는 차이가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게 참인지 거짓인지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것이 개소리다. 프랭크퍼트는 사태의 진상이 실제로 어떠한지에 대한 무관심이 개소리의 본질이라고 봤다. 또 진리의 권위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개소리는 거짓말보다 훨씬 더 큰 진리의 적”이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개소리의 확산은 다양한 형태의 회의주의에 근원을 두고 있다. 프랭크퍼트는 이를 설명하면서 ‘정확성(correctness)이라는 이념에 대한 헌신이 요구하는 규율’에서 ‘진정성(sincerity)이라는 대안적 이념을 추구할 때 요구되는 규율’로 후퇴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사실에 충실하려는 것이 무의미하므로 그 대신 개인들이 자신에 대해 충실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 ‘진정성’이라는 말이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를 뿜어낼 줄은 몰랐다. 맞다. 요즘 사람들은 확실히 정확성보다는 진정성을 추구하는 데 경도돼 있다. ‘나의 진심’이 그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그러다 보니 개소리도 나오고 개소리까지는 아니어도 문제가 많은 말, 실소를 자아내는 말이 도처에서 튀어나온다.

야당 대표를 지낸 정치인은 포맷된 휴대전화를 검찰에 제출했다는 지적에 “전반적으로 포맷 한 번씩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전반적으로 그러지 않는다. 증거인멸 의도가 없다는 자신의 진정성을 강조하려다가 나온 무리한 발언으로 보인다. 교육부 장관은 “저도 전문가이지만 (대통령에게) 제가 많이 배우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물론 배우는 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듣기에 민망하다. 대통령의 수능 관련 발언을 잘못 전했다고 질책을 받은 상황에서 대통령 비위를 맞추려 한 말로만 들린다.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티베트를 다녀온 야당 의원은 ‘인권 탄압이 심각한 곳에 왜 갔느냐’는 지적에 “70년 전에 있었던 내용(인권 탄압)을 우리가 부각하면 과연 국익에 도움이 되는가”라고 받아쳤다. 그렇다면 70년보다 더 오래된 일제 탄압도 우리가 부각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야당에선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유엔 산하기구가 아니다” “IAEA는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마땅한 국제기구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는 발언도 나왔다. 오염수 방류를 저지해야 한다는 진정성이 앞서다 보니 방류에 문제가 없다는 IAEA의 권위나 공신력을 부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한 대학교수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 3주기 추도사에서 “너의 마지막 결단을 둘러싸고 수많은 억측과 비난과 중상모략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박 전 시장의 성추행 혐의를 부인하는 이들은 꽤 많아서 박 전 시장을 옹호하는 다큐멘터리까지 제작됐다. 이들을 추동하는 힘 역시 진정성일 것이다.

진정성에 대한 프랭크퍼트의 마지막 코멘트가 통렬하다. “우리 자신에 대한 사실들은 특별히 단단한 것도, 회의주의적 해체에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본성은 사실 붙잡기 어려울 정도로 실체가 없다. 사실이 이런 한, 진정성 그 자체가 개소리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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