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말고 헌법에 충성'해야 하는 이유 [장세정의 시선]
오늘은 제75주년 제헌절(制憲節)이다. 1945년 독립한 신생 국가 대한민국이 1948년 7월 17일 당시 이승만(1875~1965) 국회의장의 건국 헌법 공포를 기점으로 국가다운 국가가 된 뜻깊은 날이다.
제헌절을 앞두고 헌법과 관련해 주목할만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지난 3일 신임 차관들에게 “국가와 국민, 자유민주주의 헌법 시스템에 충성해 달라”고 당부했다. “헌법 정신을 무너뜨리는 이권 카르텔과 싸워달라”는 주문도 했다. 앞서 지난달 28일에는 “저(대통령)에게 충성하지 마시고 헌법 정신에 충성하시라”고 차관 내정자들에게 당부했다고 한다.
■
「 헌법에 대한민국 핵심가치 담겨
헌법정신 파괴하면 '반국가세력'
헌법이 정한대로 역할 수행해야
」
'대통령 말고 헌법에 충성하라'는 발언은 2013년 10월 12일 여주지청장 시절 국회 국정감사장에서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했던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해 5월 "헌법을 준수한다"고 취임 선서한 윤 대통령은 왜 취임 2년 차에 갑자기 헌법을 다시 꺼냈을까. 서울대 법대학장과 헌법학회장을 역임한 정종섭 국학진흥원장에게 들어봤다.
-'대통령 말고 헌법에 충성하라'는 의미는.
"정치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진심이라면 백 번 타당한 말이다. 역대 대통령 중에 ‘헌법에 다 있다. 헌법을 존중하고 헌법대로 하자’고 공개적으로 말한 첫 사례다. 헌법이 정한 대로 작동하는 나라가 정상 국가다. 이제는 권력자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라 헌법에 따라 작동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이것이 국가 운영에 있어서 '비정상의 정상화'다. 차관뿐 아니라 모든 공직자가 그래야 할 것이고, 입법부의 국회의원과 사법부의 판사들도 그래야 한다."
-국회는 물론 사법부 불신도 심각하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져 국민이 재판을 불신한다. 판사들이 본래의 직분이 무엇인지 모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헌법이 정한 길에서 벗어난 재판을 했기 때문이다. 검찰 개혁과 사법부 개혁에서 무엇보다 '정치 검사'와 '정치 판사'를 척결하는 인적 청산부터 빨리하고 제도 개혁도 추진해야 한다."
-우리 헌법에 담긴 가장 소중한 가치는.
"무엇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고 존엄한 가치를 지닌 존재로 인정하고 그에 따른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국민이 각자 행복하게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자유를 보장하고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한 사회를 헌법에 규정했다. 그런 세상을 실현하기 위해 대의제 정부를 채택하고, 국가 작동의 원리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삼았다. 여러 차례 헌법을 개정했지만 이런 헌법 가치는 변경된 적이 없다."
-진영 갈등 해법을 헌법에서 찾는다면.
"독재와 권위주의 시대에 작동했던 독일 헌법학자인 칼 슈미트의 ‘적과 동지 프레임’을 1987년 민주화 달성 이후에도 극복하려는 노력을 등한시했다. 민주화 이후 정상국가를 어떻게 만들고 민주주의를 안착시킬지에 대해 깊은 고민 없이 1990년대 중반부터 정치를 권력 투쟁으로 여기고 진영 정치에 몰두해온 것이 작금의 상황을 초래했다. 헌법이 정한 국가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면 해결할 수 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사법부든 헌법재판소든 헌법이 정한 역할만 충실히 해야 한다. 정치적 중립성을 전제로 하는 경찰·검찰·국세청·감사원·공정거래위원회·한국은행·국가정보원 등이 본연의 역할만 정확히 해주면 된다. 헌법의 기본 원리가 국민 통합이다. 헌법의 요청대로 대통령이 국민 통합자 역할을 해줘야 한다."
-누가 '반(反)국가 세력'이냐를 놓고 논란인데.
"반국가 세력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이 세우고 발전시켜온 대한민국을 부정하거나 파괴하는 세력은 누구든 반국가 세력이다. 국민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 만든 헌법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세력은 모두 '헌법 파괴 세력'이고 반국가 세력이다. 국내외 구분 없는 전방위 전쟁 시대에 반국가 세력을 막지 못하면 나라가 무너질 수 있다."
삼일절·제헌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이 5대 국경일인데, 노무현 정부 때 ‘주 5일제’를 확대하면서 2008년부터 제헌절만 법정 공휴일에서 빠졌다. 주권 국가인 대한민국과 국민의 탄생을 전 세계에 선포하며 정체성을 분명히 밝힌 날인 제헌절의 의미를 가볍게 본 오류를 시정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내년부터 제헌절을 법정 공휴일로 환원하면 좋겠다.
그에 앞서 우리가 잊고 지내온 제헌절의 의미부터 되새겨야 한다. 해방 직후 좌우 대립의 혼란기에 소중한 헌법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이승만 국회의장과 신익희 부의장, 권승렬 초대 검찰총장 등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처럼 어릴 때부터 학생들에게 헌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헌법의 주인인 국민 스스로 헌법을 자주 펼쳐 봐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 사회 갈등의 해법과 미래 비전을 발견할 수 있다.
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예천 산사태로 '나는 자연인이다' 장병근씨 실종…아내는 사망 | 중앙일보
- 박정희와 죽자고 혁명했다…5·16 설계자, JP의 고백 | 중앙일보
- 홍준표도 이미 가입했다...'쓰팔'에 재미 들린 '쓰린이' 정치인들 | 중앙일보
- "종이카드 한장에 64억 대박"…日 열광한 '포케카' 뭐길래 [김현예의 톡톡일본] | 중앙일보
- 가면 체포, 안 가면 '겁쟁이'…남아공 초대 받은 푸틴 딜레마 | 중앙일보
- 오송 참사 현장서 웃은 공무원…"사람 죽었는데 재밌나" 뭇매 | 중앙일보
- 임신 8개월 여배우 잔혹살해범 추종…50여년 만에 풀려난 살인마 정체 | 중앙일보
- "창문깨고 버스 탈출 중" 딸의 마지막 문자…오송 유족 오열 | 중앙일보
- "담 걸렸다" 그 도쿄올림픽 골판지 침대…파리에서도 쓴다 | 중앙일보
- "딸 비명에 아빠는 토사 덮친 집 달려갔다"…영주 산사태 비극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