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일본의 ‘해저드 맵’
지난해 8월 초였다. 지하철 강남역이 침수됐다는 소식에 광화문에서 경기도 분당 집으로 서둘러 출발했다. 한남대교를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겨우 진입했는데 폭우가 쏟아졌다. 빗물이 순식간에 승용차 바퀴의 절반까지 차올랐다. 공포가 엄습했다. 기어가듯 운전해 4시간 만에 집에 도착했다. 그날 이후 비 오는 날에는 운전하지 않는다.
지난해 같은 날, 서울 관악구 반지하에 살던 장애인 가족 3명과 동작구 반지하에 살던 50대 여성이 침수로 목숨을 잃었다. 올여름에도 ‘물폭탄’은 예외가 없었다. 며칠째 계속된 집중호우에 충청·경북 일대 하천이 범람하고 산·제방이 무너졌다. 실종·사망 등 벌써 50명 가까운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방재 부족에 따른 후진국형 수재라는 비판도 이제 낯설지 않다.
지난해 뭇매를 맞았던 당국도 다시 비판대에 올랐다. 예컨대 서울시를 보자. 1조3000억원 예산이 필요한 대심도 빗물 배수터널은 1년이 지나도록 계획 단계다. 빗물받이를 막는다며 담배꽁초 무단투기 과태료를 5만원에서 20만원으로 올리는 방안을 논의하는 정도다. 전체 반지하(23만 가구)의 65%를 10년 안에 없애고, 세금으로 임대주택을 매입해 반지하 거주자에게 제공하겠다고 했지만, 현재 이주 가구는 전체 1% 수준이다. 지난해와 거의 달라진 게 없다.
일본은 어떤가. 2020년 8월부터 부동산 매매·임대계약 때 ‘해저드 맵’(Hazard map) 첨부를 의무화했다. 해당 주택의 홍수·지진 위험 수준은 물론 기존의 피해 여부, 피난 대피소 위치까지 표시된 지도다. “집값 떨어진다”는 반발이 있었지만, 일본 정부는 법제화를 밀어 붙었다. 국민 안전이 최우선이기 때문이다. 담배꽁초 덜 버리기에 호소하는 우리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문제는 시스템 정비다. 빗물받이 추가·확대 등을 포함한 도시 배수관 정비가 우선이다. 반지하 거주민 이주 대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현관문이 안쪽으로 열리도록 보수해 침수에 따른 인명피해를 막는 게 화급하다. 집을 신축할 때 내진설계처럼 호우설계를 의무화하는 것도 고려할 만하다. 이제 면피성 처방은 그만 듣고 싶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 한다. 올해의 ‘인재’가 과연 내년엔 줄어들 수 있을까. 지난해에도 똑같은 기대를 품었었다.
최현주 증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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