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서 30년, 목이 멘 고향의 노래
“이건 진짜 내 고향 얘기예요.” 지난 7일 경남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베이스 연광철(58)은 이렇게 말한 후 고요해졌다. 서서히 입을 뗀 그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피아노 반주 없이 고독하고 느렸다.
연광철은 한국 가곡 18곡을 나흘 동안 통영에서 녹음했다. 피아니스트 신미정과 함께했다. 첫 한국 노래 음반이다.
인터뷰에서 연광철은 “나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성악가다. 공연을 많이 안 했고 방송 출연도 안 했으니”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의 주 무대는 유럽이다. 내년까지만 봐도 파리·빈·베를린의 오페라 무대가 예정돼 있다. 그는 2018년 독일의 ‘궁정가수’ 칭호를 받았고, 2019년엔 베를린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취임 무대에서 선택한 성악가였다. 연광철의 유럽 데뷔는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시작해 30년을 활동했다. 가장 낮은 성부인 베이스 중에서도 풍성하고 고급스러운 울림을 인정받으며 오페라에서 ‘왕’과 ‘신’ 등의 역할을 주로 해왔던 그다.
그런 그가 한국 음악가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 첫 음반을 낸다. 서울 신사동의 음반매장 풍월당이 처음으로 자체 제작한다. “한국 가곡을 다시 듣고 불러야 우리도 자랑스러운 우리 노래를 갖는다”(대표 박종호)는 신념에서다.
“한국 노래를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연광철은 독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녹음한 슈베르트·브람스의 가곡 전집 음반을 예로 들었다. “피셔 디스카우처럼 모국어로 내 음악과 정서를 표현해 보려는 생각이었다.”
연광철은 유럽 본토의 청중이 인정한 성악가지만 정체성에 불안도 있었다. “독일 왕의 역할을 맡으면 그 당시 왕의 사진도 찾아보고, 동화되려고 노력한다. 동양인으로서 그들의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좋게 말하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속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한국 가곡을 부를 때는 그 자신이면 된다.
연광철은 모든 노래는 좋은 소리가 아니라 텍스트와 메시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다. “독일어로 된 노래를 부를 때면 베토벤이 갔던 술집, 슈베르트가 살았던 동네를 떠올려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노래에서는 자신의 기억이 불려 나온다. 산을 3개 넘어 학교에 다녔던 충주에서의 어린 시절 기억이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라고 노래하면 내가 어려서 다녔던 고갯길, 이슬 때문에 신발이 젖던 것 등 구체적인 그림을 많이 그릴 수 있다.”
한국 가곡은 유행이 지난 듯한 장르였다. 음악 칼럼니스트 나성인은 “외세 침탈로 위기의 시기를 겪은 한국 상황에서 노래는 민족 공동체의 응집력을 높여줬다. 여기에 개인적이고 순수 미학적인 차원의 공감도 존재했다”고 말했다. 가곡이 1920~70년대에 받은 사랑에 대한 해석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나성인은 “시심의 약화와 함께 가곡에 대한 관심이 식은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연광철은 문학에서 출발해야 한국 가곡의 아름다움도 되살아난다고 봤다. “성악가가 소리 자랑을 위해 불러서는 안 된다. 노래 자체가 시에서 시작해야 하고 시에 충실해야 한다.” 음반 발매는 10월 예정이며 12월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독창회를 계획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 가곡을 100곡 정도 불러보고 싶다. 이제 보려 한다. 변화가 가능한지.”
통영=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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