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처럼 ‘페이 잇 포워드’ 확산...‘스몰 M&A’를 엑시트·재창업 통로로
“소상공인 컨설팅 프로그램을 운영하다 ‘현타’가 왔어요. 스타트업을 보육하던 분들이 전문가라고 오는데 서로 쓰는 용어부터가 달라요. 대충 알아들은 척하고 서둘러 끝내거나, ‘컨설팅은 시간 낭비’라며 회피하는 사장님이 많아 중간에서 애를 먹었습니다.” (소상공인 보육 프로그램 담당 C매니저)
정부가 기업가형 소상공인 육성을 주요 국정 과제로 내세우지만, 현장에서는 파열음이 적잖게 흘러나온다. 관련 프로그램 운영기관 심사에서부터 투자 대상 발굴, 컨설팅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가 불거지면서다. 구색과 실적을 맞추는 데 급급한 불도저식 정책 추진보다는, 스타트업처럼 선순환할 수 있는 산업 생태계 조성이 먼저라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가형 소상공인 생태계 조성에 필요한 정책을 살펴본다.
‘성장 촉진’ 금융 인프라 마련
‘스몰 M&A’로 고용 유지·기회
“가맹점 35개씩을 운영하는 메가 프랜차이지(다점포 운영 기업)가 2곳 있습니다. 이들을 소개해준 건 투자은행(IB)이었습니다.”
미국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200여개 가맹점을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웻즐스 프레즐’ 최고운영책임자(COO)의 얘기다. 미국에서는 프랜차이즈 가맹점을 수십~수천 개 운영하는 메가 프랜차이지가 수백 개에 이른다. 연매출은 조 단위에 이르고, 증시에 상장도 한다. 150여개 가맹점을 운영하는 일본의 메가 프랜차이지 ‘아리가또서비스’도 오사카 증시에 상장돼 있다.
오프라인 매장에 대한 ‘스몰 인수합병(M&A)’의 가장 큰 장점은 ‘고용 유지’다. 폐업 대신 경영주만 바뀌니 직원은 물론, 식자재를 납품하던 중소 도매상도 타격을 피할 수 있다.
이들이 생계형 점주에서 어엿한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고도화된 금융 인프라다. 일부 지역에서 영업이 부진하면 적게는 3~4개, 많게는 1000개 가까이 매장을 통매각할 수 있는 M&A 시장과 인수 금융이 활성화된 덕분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다점포 확장을 지원하는 금융 인프라가 사실상 전무하다. 프랜차이즈 본사도 증시에 상장하기가 바늘구멍 뚫기만큼 어려운데, 가맹점주나 개인사업자에 대한 추가 출점 지원은 ‘언감생심’이다.
서울에서 주점, 카페, 식당 등 16개 외식 매장을 운영하던 다점포 점주 D씨 사례를 보자. 그는 50명 넘는 직원을 고용하며 최고 세율 구간의 소득세 42%를 성실히 납세했다. 코로나 사태가 터지자 집합 금지, 영업시간 단축 등 정부 방역 조치에 적극 협조했다. 덕분에 그가 운영하던 16개 매장에서는 코로나 확진자가 단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단 한 개 매장분의 재난지원금뿐이었다. 나머지 15개는 ‘동일 점주 매장’이라며 지원 대상에서 제외됐다. 반면 세금을 덜 내기 위해 명의를 쪼개 다점포를 운영하던 이들은 모든 매장에서 재난지원금을 받았다.
선진국이 고용 규모, 납세 기록에 따라 거의 100% 정률 보장한 것과 대조된다.
방수준 알파랩 대표는 “국내 M&A 시장은 최소 수십억원 이상 고액대로 이뤄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외식업이나 라이프스타일 분야는 5억원 안팎 작은 금액대의 스몰 M&A가 활성화돼야 한다. 그래야 창의력 있는 기업가형 소상공인들이 로컬 기반 창업 후 ‘엑시트(Exit·투자금 회수)’하고 재창업하는 선순환이 가능해진다”고 강조했다.
창업 교육 네트워킹 활성화
선배가 후배 멘토링 ‘페이 잇 포워드’
스티브 잡스 애플 창업자가 12세 때의 일화다. 전화번호부에서 휴렛팩커드(HP) 창업자 빌 휴렛의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주파수 계수기를 만들고 싶은데 남는 부품이 있으면 저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라고 대뜸 물었다. 빌 휴렛은 어린 잡스에게 부품을 줬을 뿐 아니라, 그해 여름 잡스가 HP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했다.
도움은 릴레이로 이어졌다. 애플 CEO가 된 잡스는 마크 주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가 사업 초기 어려움을 겪을 때 아낌없는 조언을 해줬다. 2011년 잡스가 사망하자 주커버그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스티브, 멘토이자 친구였음에 감사드린다”는 글을 남겼다. 주커버그 역시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모이는 크고 작은 행사에 참석해 자신의 성공 노하우를 전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스타트업업계에서는 이처럼 선배 창업가가 후배 창업가를 돕는 ‘페이 잇 포워드(Pay It Forward)’ 문화가 일상화돼 있다. 덕분에 스타트업 창업자는 ‘맨땅에 헤딩’하지 않고, 경영 구루의 코칭을 받아 성공의 대물림을 할 수 있다.
반면 소상공인은 선배 창업가의 성공 노하우를 전수받을 ‘통로(제도나 서비스)’를 찾기 힘들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과 각 지자체에서 창업 컨설팅을 진행하고는 있다. 그러나 여기서 컨설팅을 하는 이들은 선배 창업가가 아닌, 경영 컨설턴트가 대부분이다. 창업 경험이 없으니 소상공인과 같은 눈높이에서 실질적인 조언을 하거나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최근에는 젊은 소상공인을 중심으로 동종 또는 이종업계의 또 다른 고수나 예비, 초보 자영업자와 만나 노하우를 공유하고 협업하거나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 활성화되고 있다. 장사 경험이 없는 컨설턴트보다는 ‘페이 잇 포워드’ 정신을 지닌 장사 고수나 선배 창업가들과 이어주는 프로그램이 활성화되면 좋겠다.” 조영훈 영영키친 대표 의견이다.
소상공인 전담 차관·관광청 신설
600만 소상공인·자영업자 컨트롤타워
“농어민이 300만명인데도 농림부가 있다. 문화예술인 등록자는 10만명인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있다. 그런데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는 600만명에 달하는 데도 전담 부서가 없다.”
정부 조직을 개편할 때마다 업계에서 나오는 단골 레퍼토리다.
현재 정부 직제상 소상공인 정책을 전담하는 최고 컨트롤타워는 중소벤처기업부의 소상공인정책실장(1급)이다. 물론 중기부 장관, 차관도 소상공인 정책을 주관하지만 ‘전담’하지는 않는다. 상황이 이렇자 부처명에 명시된 중소기업, 벤처에 비해 소상공인 정책은 후순위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종사자 수나 산업 규모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데도 상대적으로 저평가되고 있다는 지적이 계속적으로 제기되는 배경이다.
정치권에서도 소상공인 전담 차관 신설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흘러나온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전담 차관 신설을 소상공인 분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웠다. 오동윤 중소벤처기업연구원장, 오세희 소상공인연합회장도 대선 당시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대통령직인수위원회를 향해 소상공인 전담 차관 신설을 정식 건의했다. “중기부 내 소상공인 이슈가 복합적이기 때문에 관련 이슈를 감당할 수 있는 전담 차관이 필요하다(오동윤 원장)”는 이유에서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는 물론, 지자체에서도 공무원 사이에 ‘소상공인 정책 담당은 한직’이라는 인식이 적잖다. 관련 분야 최고 직제가 1급으로 ‘천장’이 막혀 있기 때문이다. 전담 차관이 생기면 관가에 상징적 메시지를 줄 수 있어 현업 부서에도 힘이 실릴 것”이라고 말했다.
외식업이나 라이프스타일 산업이 갈수록 글로벌화되며 ‘관광청’ 신설 필요성도 제기된다. 일례로 일본은 2008년 관광청 신설 후 10년간 관광객이 2배 이상 급증했다. 엔저 효과도 컸지만, 시내면세점 확대, 비자 발급 완화, 총리 주재 국가관광전략회의 등 정책 드라이브 효과도 상당했다는 평가다.
소상공인 정책 라인에 민간 전문가를 영입하는 ‘개방형 공모제’ 도입도 해볼 만하다. 중기부의 스타트업 정책을 관장하는 창업벤처혁신실장(1급)은 이미 2017년부터 개방형 공모제를 시행했다. 그 결과 다음커뮤니케이션, 엔비디아, 라이코스 출신의 외부 인사들이 연이어 선임되면서 경직되기 쉬운 공무원 조직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었다.
반면 소상공인 정책 사령탑에는 민간 혁신 인사가 선임된 사례를 찾기 힘들다. 소상공인정책실장은 물론,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이사장도 공무원, 교수, 지자체장 출신 인사들이 선임됐을 뿐이다.
소상공인 전문 미디어 육성
공론화·소통 창구 없어…정책 도달 ‘×’
“소상공인은 가장 연구하기 어려운 분야 중 하나예요. 일단 인터뷰가 쉽지 않아요. 사장님들이 늘 바쁘고 대화 방식은 투박하니 약속을 잡는 일부터 난관에 부딪히죠. 결국 현장과 괴리된 보고서 몇 개 내다가 다른 분야를 지원하는 연구원이 많습니다.”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의 얘기다. 정계, 관계, 학계 등 제도권에서 소상공인 분야는 ‘미지(未知)의 영역’에 가깝다. 정책과 연구의 대상인 소상공인의 ‘목소리’를 듣는 일부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같은 문제는 여론조사업계의 설문조사 단가 차이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직장인 대상 설문은 수백 명도 100만원 이하로 신청이 가능하지만, 자영업자 대상 설문은 100명만 대상으로 해도 200만원 가까이 든다. 자영업자는 응답률이 낮아 설문 기간과 인력이 더 소요된다는 이유에서다.
메신저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이나 미디어도 미흡하기는 마찬가지다.
반면 자영업 분야는 전문 매체나 뉴스레터 서비스 자체를 찾아보기 힘들다. 외식업계에서 발간하는 일부 전통 매체가 있지만, 월간 또는 계간으로 발행되는 지면 잡지가 대부분이어서 보도의 접근성과 신속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다.
해외와 비교하면 더욱 아쉽다. 미국은 ‘Franchise Update Media’ ‘Restaurant Business’ 등 전문 매체가 여럿 있다. 이들은 프랜차이즈 다점포율을 20년 넘게 전수조사하고, 팟캐스트와 뉴스레터로 외식업 트렌드를 전하는 등 심층 취재와 의제 설정으로 업계를 선도한다. 일본에서는 닛케이비즈니스가 지난해 8월 커버스토리로 외식업계 위기와 해법을 심층 보도한 후 ‘외식을 구하는 것은 누구인가(外食を救うのは誰か)’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발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상공인은 ‘정보 약자’다. 긴 영업시간과 디지털 리터러시(문해력) 부족으로 수혜 정책이나 제도를 모르고 지나치기 쉽다. 때문에 혜택이 꼭 필요한 영세 소상공인 대신 프랜차이즈나 컨설팅 업체가 수혜를 독차지하는 경우가 적잖다. 공신력과 전문성을 겸비한 대중적인 전문 미디어를 육성해 정보의 비대칭성을 해소하고 공론의 장이 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강병오 FC창업코리아 대표(창업학 박사) 주장이다.
글로벌 진출 촉진
해외 창업 컨트롤타워 부재
“ ‘오사카의 명동’에 해당하는 일본 도톤보리 상권은 최근 월세가 코로나 팬데믹 이전보다 절반가량 낮아졌다. 보증금, 권리금도 사실상 없고 한류와 K푸드도 열풍이다. 2020년대에는 일본 창업에 기회가 있다. 포화된 한국에서 창업하기보다 일본으로 눈을 돌릴 때다.”
K팝, K드라마에 이어 K푸드까지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면서 글로벌 시장에서 비기술 창업의 성공 가능성이 여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미 세계 각지에서 K프랜차이즈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미국에선 치킨 프랜차이즈 BBQ가 250여개 매장을 출점하고, 동남아에선 두끼떡볶이 매장에 1시간가량 대기 행렬이 늘어서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내국인의 해외 창업을 지원하는 정부 컨트롤타워는 부재한 상황이다.
정부도 최근 기업가형 소상공인의 글로벌 진출 촉진에 나서고 있기는 하다. 중기부의 강한 소상공인 성장 지원 사업에 ‘글로벌’ 분야를 신설, 25팀에 최대 1억원가량 사업화 자금과 컨설팅을 지원한다. 글로벌 분야 운영기관인 엔피프틴파트너스는 올해 처음 해외에서 열리는 세계한상대회에 참가, 기업가형 소상공인들의 제품과 서비스를 세계에 알린다는 복안이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진출은 장기적 과제인 만큼 중기부는 물론, 관계 부처 간 유기적 정책 협조와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강병오 대표는 “최근 국내 프랜차이즈의 해외 성과는 지난 20여년간 끊임없이 도전하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노하우를 쌓은 축적의 시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랜차이즈가 아닌, 스몰 브랜드의 글로벌 진출은 아직 역사가 일천한 만큼 단기적으로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중기부, 재외동포청, 관광청, 문체부 등 유관 부처가 장기적 관점에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문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17호 (2023.07.12~2023.07.18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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