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이런 사람이 총수” 공정위, 명문화했지만...
성장 피하려는 중소기업 급증
총수 제도 실효성 재검토해야
“과태료로 처벌 완화” 의견도
공정거래위원회가 1986년 대기업집단 제도 도입 이후 처음으로 동일인(총수) 판단, 지정 기준을 명문화하면서 재계 논란이 뜨겁다. ‘깜깜이’로 불렸던 총수 관련 기준을 객관화했지만 외국인 총수 지정 근거가 제외돼 여전히 미흡한 점이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5가지 총수 기준 명문화
공정위는 지난 6월 29일 ‘동일인 판단 기준, 확인 절차에 관한 지침’ 제정안을 마련했다. 동일인은 상호출자제한, 일감 몰아주기 등 규제가 적용되는 기업집단 범위를 판단하는 근거 개념이다. 누가 총수로 지정되느냐에 따라 각종 규제 대상, 범위가 달라질 수 있어 기업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민감한 문제다.
공정위는 그동안 ‘기업집단을 사실상 지배하는 자’를 총수로 지정하고 지정 자료 제출 의무 등을 부과했다. 대기업집단을 지배하는 총수가 되면 국내외 계열사 공시, 자료 제출 의무가 생기고 일감 몰아주기, 내부거래 규제를 받는다. 친족의 사업 현황과 주식 보유 현황 등을 매년 공정위에 신고해야 한다. 이를 누락하면 2년 이하 징역 또는 1억5000만원 이하 벌금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정작 기업 규제가 명확한 법적 정의조차 없이 운영된다는 지적이 제기돼왔다.
공정위는 이번 제정안을 통해 다섯 가지 총수 판단 기준을 명문화하겠다고 밝혔다. ① 기업집단 최상단 회사의 최다 출자자 ② 기업집단의 최고 직위자 ③ 기업집단의 경영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 ④ 기업집단 내·외부적으로 대표자로 인식되는 자 ⑤ 승계 방침에 따라 기업집단의 동일인으로 결정된 자 등이다. 다섯 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요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동일인을 지정하겠다고 밝혔다.
일례로 현대차그룹 총수는 2021년 정몽구 명예회장에서 정의선 회장으로 바뀌었다. 정 회장은 의결권 기준 현대차의 최다 출자자에 해당한다. 대표이사 회장으로서 경영상 주요 의사 결정을 주도적으로 해왔고, 대외적으로도 회장으로 인식되는 만큼 1~4번 기준을 충족한다.
물론 법인 등기에 기재된 직함이 ‘회장’이나 ‘이사회 의장’이 아니더라도 기업집단 내 상위 직위자가 존재하지 않으면 총수로 지정될 수 있다. 한기정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배력을 행사하는지 즉, 기업집단 경영에 대해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설명했다. “대표이사 등 임원의 임면, 조직 변경, 신규 사업 투자 등 주요 의사 결정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하는 경우 기준을 충족한다”는 것이 공정위 설명이다.
공정위는 5가지 판단 기준에 해당하는 자가 상이할 경우에는 종합적으로 판단하기로 했다. 한진그룹 총수인 조원태 회장은 최상단 회사의 최다 출자자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다. 조 회장의 한진칼 지분은 2.32%로 사모펀드 KCGI(지분 14.98%)보다 한참 낮다. 하지만 회장 직함을 보유한 최고 직위자인 데다 지배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기업 안팎에서 대표자로 인식돼 총수에 올랐다.
다만 이런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는 기업집단의 국내 최상단 회사 또는 비영리법인이 총수가 될 수 있다. 공정위는 지난 4월 총 82개의 대기업집단을 지정했다. 이 중 10곳에 대해 총수 없이 법인을 동일인으로 분류했다. 법인이 동일인인 기업들은 포스코, KT&G 등 민영화된 옛 공기업이거나 한국GM, 에쓰오일 같은 외국계 기업이다.
대기업 규제 수두룩
‘피터팬 증후군’ 갈수록 심각
재계는 공정위가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하면서 향후 총수 판단에서 객관성과 기업의 예측 가능성이 한층 높아질 것으로 내다본다. 최근 2·3세로의 경영권 승계가 늘고 다양한 지배구조의 기업집단이 출현하면서 기준 마련 필요성이 대두됐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그동안 대기업, 외국계 기업을 중심으로 공정위 총수 제도가 불확실하다는 지적이 많았는데 기준이 명확해지면서 재계 불안감이 상당히 완화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네이버는 2017년 공정위가 창업자 이해진 글로벌투자책임자(GIO)를 총수로 지정할 때 “전문경영인과 이사회 중심 경영 체제를 확립한 만큼 총수 없는 (동일인이 법인인) 기업집단으로 지정돼야 한다”며 이의를 제기한 바 있다. 하지만 공정위는 국민연금 등 기관 투자자를 제외하면 이해진 GIO가 네이버의 최다 출자자고 경영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등 4가지 요건을 충족한다고 판단해 네이버의 요청을 거부했다. 이해진 의장은 이번에 내놓은 동일인 판단 기준 1~4를 충족하는 만큼 동일인 지정에 문제가 없다는 것이 공정위 설명이다.
한편에서는 총수 지정 제도가 여전히 부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총수 판단 기준이 명문화됐을 뿐, 총수 기준 자체가 개선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5가지 기준 중 몇 개를 충족해야 총수에 해당하는지 등의 구체적인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총수 개념은 국가 주도 개발 시기인 1980년대 대기업 독과점 문제가 불거진 상황에서 일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재벌 체제를 견제하기 위해 도입됐다. 문어발식 사업 확장을 막고 소수 기업에 경제력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컸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 세계 시장이 개방되면서 과거 대비 경제력 집중도가 완화됐다. 매출 상위 100대 기업의 해외 법인 매출 비중이 50%를 넘을 정도다. 감사위원 분리 선출과 의결권 제한, 다중 대표 소송 등 대주주 견제 장치가 이미 촘촘한 상황에서 굳이 총수를 정해 규제 대상에 올리는 것은 지나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총수 지정 제도는 글로벌 스탠더드에도 맞지 않다는 분석이다. 대기업집단과 총수 지정제는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는 ‘갈라파고스’ 규제다. 우리가 제도를 본뜬 일본도 순차적으로 총수 관련 제도를 폐지했다. 실제로 ‘동일인’을 영어로 번역하면 ‘Same Person’이다. 영미법에 마땅한 법률 용어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도한 규제가 혁신 기업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자산 5조원 이상 대기업집단에 지정되면 65개 규제가 추가로 적용된다. 10조원 이상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에 들어가면 68개 규제가 또다시 추가된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올 6월 기준 61개 법률에 342개 대기업 차별 규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법률별로 살펴보면 공정거래법 67개(19.6%), 금융지주회사법 53개(15.5%), 금융복합기업집단법 39개(11.4%), 상법 22개(6.4%) 순으로 대기업 차별 규제가 많았다. 단순히 덩치가 커졌다는 이유로 기업에 수많은 족쇄를 채운다는 의미다.
예컨대 카카오는 2015년 자산총액 5조원을 넘기며 공정위로부터 기업집단 지정을 위한 자료 제출을 요구받았다. 실무자는 계열사 임원이 소유한 회사도 기업집단에 포함된다는 사실을 몰라 관련 자료를 챙기지 못했다. 실무자가 뒤늦게 공정위에 누락 사실을 알리자, 검찰은 자료를 허위로 제출했다며 김범수 당시 카카오 의장을 형사 기소했다.
실상을 들여다보니 누락된 회사들은 계열사 임원이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스크린골프장(자산총액 5400만원)과 임원이 직원에게 출자금을 대준 보드게임방(자산총액 4900만원)으로 회사와 전혀 거래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이에 법원은 “실무자의 단순 실수로 실무자나 총수 모두에게 자료 누락의 고의가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국내 최대 규모 법무팀을 꾸린 삼성전자조차 지난해 4월 총수인 이재용 당시 부회장이 대기업 지정 자료 누락을 이유로 공정위로부터 경고 처분을 받은 바 있다.
한편,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지 않기 위해 꼼수를 부리는 중견, 중소기업이 수두룩하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일명 ‘피터팬 증후군’이다. 피터팬 증후군이란 중소기업 범위를 넘어서면 각종 규제를 받기 때문에 중소기업이 이를 피하려 일정 수준 이상으로 성장하지 않으려는 현상을 뜻한다.
논란이 커지자 경제단체들은 아예 기업집단 총수 제도 자체의 실효성을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총수 기준뿐 아니라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 공시대상기업집단 등 낡은 제도를 철폐해나가야 한다는 의견이다. 전경련 측은 “인물이 아닌 그룹 핵심 기업을 동일인으로 지정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동일인 제도를 폐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관련 처벌이 지나치다는 의견도 나온다. 자료 제출을 누락할 때 고의성이 명백한 경우에만 형사 처벌을 제한적으로 적용하고 과태료 부과 정도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추광호 전경련 경제산업본부장은 “치열한 글로벌 경쟁 시장에서 우리 기업이 살아남고,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시대에 맞지 않는 낡은 대기업 차별 규제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밝혔다.
외국인 총수는 사각지대
통상 마찰 우려로 외국인 지정 못해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해묵은 논란’인 외국인 총수 관련 규정이 이번 기준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서도 시끌시끌하다.
쿠팡의 경우 김범석 의장이 이번 5가지 기준 중 3가지를 충족해 총수 요건에 해당하지만, 쿠팡은 동일인이 쿠팡 법인이다. 김 의장이 미국 국적이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통상 마찰 이슈 때문에 쿠팡의 동일인으로 지정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일례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대주주인 에쓰오일의 경우 법인을 동일인으로 지정해놓고, 미국 회사인 쿠팡은 개인인 김 의장을 동일인으로 지정한다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최혜국 대우 조항에 위배될 수 있다는 우려다.
자칫 해외 투자자가 총수 지정에 따른 주가 하락 등을 빌미로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을 제기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쿠팡 모기업인 쿠팡Inc는 뉴욕 증시 상장사다. 이미 한국보다 까다로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규제를 받는 상황에서 동일인 지정으로 ‘이중 규제’에 묶일 경우 경영, 투자 위축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한기정 위원장은 “외국인 총수 규정은 통상 이슈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모색해 지속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규제 개선이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외국 국적을 가진 총수의 2·3세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인 만큼 사각지대로 인한 형평성 우려는 커질 전망이다.
“한국에 투자를 늘리겠다는 외국인 투자 기업에 동일인 지정의 족쇄를 채우면 한국 투자를 설득할 명분이 사라지고 경제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외 투자 기업의 특수성을 감안한 제도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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