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뽑고 사과밭 만들더니…" 산사태 덮친 경북 예천 비명
“60년 넘게 이 동네에 살았는데 이런 비는 처음이다. 산사태도 TV로만 봤지 내가 겪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우르르’ 소리가 날때도 산사태는 아예 생각도 안 했다.”
15일 발생한 산사태로 집을 잃은 경북 예천군 효자면 백석리 주민 이근섭(64)씨의 말이다.
사흘 넘게 폭우가 이어진 경북에선 16일 오후 6시 기준 19명이 사망하고 8명이 실종됐다. 경북 재난안전대책본부(본부)에 따르면 사망자 19명 중 16명이 산사태에 직접 휩쓸리거나 집이 매몰ㆍ침수돼 변을 당했다. 경북은 원래 산지가 많은 만큼 산사태 위험에 노출된 곳도 많은 지역이다. 국민의힘 정희용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6월 기준 경북 내 4935곳이 지자체에서 지정한 ‘산사태 취약지역’으로, 강원(2892곳), 전북(2311곳) 등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또 취약지역 거주 인구(9977명)와 최근 5년간 피해 건수(2156건)도 전국에서 가장 많다.
사흘간 한달 장마보다 더 많은 비…한해 평균치 배로 내린 곳도
하지만 이번 비로 산사태 피해가 발생한 지자체의 공무원들과 주민들 사이에선 “예상치 못한 일이다. 당혹스럽다”는 반응이 다수 나왔다. 산사태 위험이야 어느 정도 예견하긴 했지만, 짐작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비가 장시간 쏟아진 탓에 피해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본부는 지난 13일부터 16일 오후 3시까지 영주와 문경에는 각각 306.2㎜와 304.7㎜의 비가 쏟아졌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장마 기간인 6월 23일부터 7월 25일까지 영주와 문경에 내린 비는 각각 291.5㎜, 문경 225.9㎜였다. 약 사흘만에 지난해 한달 넘게 내린 비보다 훨씬 많은 양이 퍼부은 것이다. 피해가 가장 심했던 예천도 원래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이 아니다. 연평균 강수량이 240.9㎜에 불과하다. 그러나 올해는 7월 현재까지 강수량만으로도 평년의 두배 수준이다. 이미 지난 10년 중 최고치를 갱신했다. 예천 벌방리에 사는 60대 신모씨는 “이 동네에 평생 살면서 이런 비는 처음 본다. 수백명이 죽었다는 태풍 때도 이정도로 비가 오진 않았다. 댈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산사태가 난 지점에 대해서도 “생각지도 못했던 곳”이라는 말이 나왔다. 집중 관리와 대비가 이뤄지는 ‘산사태 취약지역’을 조금씩 벗어난 지점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해서다. 취약지역은 5년마다 실시하는 산림청 기초조사와 지자체의 현장 실태조사 등을 토대로 지자체장이 지정한다. 취약지역에선 재해 예방을 위해 인공구조물을 설치하거나 나무를 심는 등의 사방사업이 우선 실시된다. 예천군과 경북도도 이에 맞춰 2월과 4월부터 수개월간 취약지역 점검 및 종합 예방 대책 수립 등을 실시했다.
그러나 예천 백석리와 금곡리, 벌방리 등 산사태가 발생한 지점은 취약지역이 아니다. 예천군청 관계자는 “산사태 취약지역 지정은 산, 그 중에서도 골짜기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며 “이번 산사태가 난 지역은 과수원이나 논밭이 많은 곳이다. 지역 산지를 개간해 논밭을 만들었는데 비가 쏟아지면서 토사가 함께 흘러내린 것으로 보인다. 논밭은 산사태 취약 지역으로 지정하지 않으며 집중 대비나 관리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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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년 된 나무 베는데 사고 안나겠나”…무분별한 개간 지적도
주민들 중에선 10년 전쯤부터 산지를 대규모로 개간해 사과밭 등으로 바꾼 것을 산사태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사람이 많았다. 예천이 고향인 70대 김모씨는 “말그대로 무분별한 개간이 이뤄졌다”며 “누님도 예천에 사는데 그 동네 주민 반 이상이 귀농한 사람들이고, 대부분 나무랑 풀을 베고 과수원을 만들었다. 수십년 자란 나무를 뽑고 사과나무 심는데 산사태가 안나겠나”라고 주장했다. 산지가 논과 밭으로 바뀐 상태에서 기록적인 폭우가 더해지며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산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실제 토사가 마을을 덮쳐 5가구가 매몰된 백석리 현장을 중앙일보가 드론으로 촬영해 살펴본 결과 산사태 발생 지점 인근은 온통 사과밭이었고, 피해 현장 곳곳에 다 익지 않은 초록색 사과가 나뒹굴고 있었다. 주민들은 “산에서 물이 내려오다 사과밭에 도달했고, 농로를 따라 토사가 우르르 쏟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마을 이장 황보성(66)씨는 “주민 85%가 사과 농사를 짓는다. 마을에 이렇게 폭우가 온 적이 없어서 산사태가 날 줄 몰랐다”라고 말했다. 산사태로 사망자가 나온 문경시 산북면 가좌리 역시 사망한 이모씨의 집 뒤편으로 20년 전 만들어진 밭이 넓게 자리잡고 나무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한 주민은 “이 동네에 귀농 인구가 많아 땅이 부족할 정도”라고 전했다.
산사태 연구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이수곤 전 서울시립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백석리 현장사진을 보고 “10년 전 위성사진과 비교했을 때 산 전체에 도로와 농지를 위한 전반적인 개간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런 공사 뒤엔 토양 자체가 약해지고 지형이 가팔라지는 등 산사태 위험이 커진다”고 분석했다. 서준표 국립산림과학원 주무관도 “일반적으로 어린 나무와 어른 나무, 침엽수와 활엽수가 조화로운 숲이 산사태에 강하다”고 말했다.
주민들 “평생 본적도 없는데…산사태 생각은 못했다”
예천군은 “안전재난과에서 행정안전부 기준에 맞춰 13일 오후부터 14건의 재난문자를 발송했고, 예산군 자체적으로도 14일부터 16일 정오까지 9번 대피 관련 문자를 발송했다”고 밝혔다. 다만 이 중 산사태 관련 경고나 대피 안내 관련 내용은 7건이었다.
주민들 역시 산사태를 우려하진 않았다고 했다. 벌방리 주민 장모(68)씨는 “산사태가 나기 얼마까지도 흙탕물과 바위가 굴러 내려오던 지점 바로 옆에서 사람들이랑 같이 배수 작업도 하고 일부는 차를 옮기고 했다. 산사태 자체를 생각도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주민 김모(83)씨는 “실종된 사람도 산사태 생각은 못하고 그냥 비가 많이 오니 집안에 있겠다고 하다가 휩쓸려버렸다. 다른 사람들도 평생 산사태를 본적도 없는데, 문자를 봐도 대피할 생각을 했겠나. 순식간이라 경황도 없었다”고 했다.
경북도청 관계자는 “이번 피해의 경우 지역의 기존 재난 유형과는 다른 느낌이 분명히 있다”며 “기후 변화로 인한 것인지, 일회성 재난인지 등에 대한 기상청과 지자체의 사후 분석과 의견 제시가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이 전 교수는 “추후 같은 재난을 막기 위해서는 현재의 산사태 예방 대책에 산지 개간의 위험성 평가도 포함시키는 등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윤정민ㆍ백경서ㆍ김홍범ㆍ이영근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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