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관심 적어진 한국 노래 되살리는 연광철
가곡 18곡 골라 음반 제작, 12월엔 콘서트도
유럽 본토 인정받은 성악가 "한국 노래가 내 정체성"
“이건 진짜 내 고향 얘기에요.” 7일 오전 경남 통영의 통영국제음악당. 베이스 연광철(58)이 말한 후 고요해졌다. 서서히 입을 뗀 그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피아노 반주 없이 고독하고 느렸다. 소리에 힘을 빼고 한숨 쉬듯 하는 노래였다.
연광철이 이날 녹음한 ‘고향의 봄’은 그의 한국 가곡 음반에 보너스 트랙으로 들어간다. 연광철은 한국 가곡 18곡을 나흘 동안 통영에서 불러 녹음했다. 피아니스트 신미정과 함께했다. 연광철의 첫 한국 노래 음반이다.
인터뷰에서 연광철은 “나는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성악가다. 공연을 많이 안 했고 방송 출연도 안 했으니”라고 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그의 주 무대는 유럽이다. 5월 함부르크에서 바그너 ‘탄호이저’에 헤르만 영주로 출연했고, 지난달엔 바덴바덴에서 바그너 ‘파르지팔’ 중 노(老)기사 구르네만츠 역을 맡았다. 내년까지만 봐도 파리ㆍ시카고ㆍ빈ㆍ베를린의 오페라 무대가 예정돼 있다. 그는 2018년 독일의 ‘궁정가수’ 칭호를 받았으며 이듬해엔 베를린필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취임 무대에서 선택한 성악가였다. 그에 비해 한국 공연은 많지 않았다.
연광철의 유럽 데뷔는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시작해 30년을 활동했다. 가장 낮은 성부인 베이스 중에서도 풍성하고 고급스러운 울림을 인정받으며 오페라의 ‘왕’ ‘신’ 등의 역할을 주로 해왔던 그다.
그런 그가 한국 음악가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 첫 음반이다. 서울 신사동의 음반매장 풍월당이 처음으로 자체 제작한다. “한국 가곡을 다시 듣고 불러야 우리도 자랑스러운 우리 노래를 갖는다”(대표 박종호)는 신념에서다. 김순남 작곡의 ‘진달래꽃’(김소월 시), 윤이상 ‘달무리’(박목월 시), 김순애 ‘그대 있음에’(김남조 시), 홍난파 ‘사랑’(이은상 시) 등 1930~70년대 우리 노래를 골라서 불렀다. 미국에서 활동 중인 작곡가 김택수(43)에게 위촉한 신작 ‘산 속에서’(나희덕 시), ‘산복도로’(황경민 시) 도 포함됐다.
“한국 노래를 늘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독일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녹음한 슈베르트ㆍ브람스의 가곡 전집 음반을 예로 들었다. “피셔 디스카우처럼 모국어로 내 음악과 정서를 표현해 보려는 생각이었다.” 연광철은 유럽 본토의 청중이 인정한 성악가지만 정체성에 불안도 있었다. “독일 왕의 역할을 맡으면 그 당시 왕의 사진도 찾아보고, 동화가 되려 노력한다. 다행히 그들이 공감한다는 것에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동양인으로서 그들의 모습으로 살아가야만 했다. 좋게 말하면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속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한국인인데 독일 왕처럼 행동해야 한다.”
한국 가곡을 부를 때는 그 자신이면 된다. “‘산’이나 ‘새’라는 시어가 나오면 기억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유럽의 산이 아니라 한국의 조밀조밀하고 친근감 있고 부드러운 산을 떠올려도 되니 좋았다.” 모든 노래는 좋은 소리가 아니라 텍스트와 메시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성악가다. “독일어로 된 노래를 부를 때면 베토벤이 갔던 술집, 슈베르트가 살았던 동네를 떠올려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노래에서는 연광철 자신의 기억이 불려 나온다. 산을 3개 넘어 학교에 다녔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다.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라고 노래하면 이런 장면이 떠오른다. 내가 어려서 다니던 고갯길, 이슬 때문에 신발이 젖던 것. 구체적인 그림을 많이 그릴 수 있다.”
한국 가곡은 유행이 지난듯한 장르였다. 태생 자체는 민중과 함께했다. 음악 칼럼니스트 나성인은 “외세의 침탈로 위기의 시기를 겪은 한국 상황에서 노래는 민족 공동체의 응집력을 높여줬다. 여기에 개인적이고 순수 미학적인 차원의 공감도 존재했다”고 했다. 음악은 서양의 형식이되 한국 시문학의 풍요함을 담은 가곡이 1920~70년대에 받은 사랑에 대한 해석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상황이 달라졌다. 나성인은 “시심의 약화와 함께 가곡에 대한 관심이 식은 것이 사실”이라고 했다.
연광철은 문학에서 출발해야 한국 가곡의 아름다움도 되살아난다고 봤다. “성악가가 소리 자랑을 위해 불러서는 안 된다. 노래 자체가 시에서 시작해야 하고 시에 충실해야 한다.” 이번 녹음에서도 한국어는 자연스럽게, 시의 뜻은 정확하게 전달되도록 했다. “한국 가곡 중에는 불필요한 조사를 강조하거나, 시의 이야기를 무시하는 곡들이 있었다. 음악을 먼저 만들어 놓고 시를 붙이는 순서가 문제였다.”
연광철은 서양의 창법과 한국어의 결합을 무던히 연구했다. “예를 들어 ‘나의’라는 구절이 나오면 밝은 ‘에’로 노래 할 것인지, 목 뒤쪽에서 나오는 ‘에’로 할지 결정해야 했다.” 김택수는 새 곡 작곡 전에 연광철에게 전화로 시 낭독을 부탁했다. 자연스러운 한국어를 따르는 음악을 위해서다.
연광철은 한국 가곡이 오케스트라가 아닌 피아노와 함께 밀도 높은 대화로 전달돼야 한다고 했다. “성악가와 피아니스트가 일대일로 연주해야 서로 표현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진다.” 음반 발매는 10월 예정이며 12월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한국 가곡 독창회를 계획하고 있다. “앞으로 한국 가곡을 100곡 정도 불러보고 싶다. 이제 보려 한다. 변화가 가능한지.”
통영=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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