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찾아온 전처 아들, 행복한 삶에 균열이 생겼다

김상목 2023. 7. 16. 13:3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독립예술영화 개봉신상 리뷰] <더 썬> 좋은 부모가 되기란 어렵다

[김상목 기자]

 영화 <더 썬> 포스터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주)
 
2021년 프랑스 출신 신인감독의 600만 달러 저예산 영화 한 편이 화제를 끈다. 그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낯선 영화는 각색상을 수상한다. 그뿐이 아니다. 남우주연상 또한 그 영화의 몫이었다. 상당수 영화인들은 이 영화가 감독상이나 작품상 후보에 오르지 못한 걸 지적하기도 했다. '플로리안 젤러'라는 프랑스 감독의 영화 <더 파더>가 그 주인공이다. 남우주연상 수상은 배우가 'sir' 칭호가 붙은 영국의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였기에 고개를 끄덕일 만 했지만 대체 1979년생 늦깎이 신인감독은 어디서 '갑툭튀'한 걸까 궁금해할만했다.

하지만 영화계를 벗어나 문화예술 전반으로 시야를 넓히면 충분히 수긍이 갈 법했다. 플로리안 젤러라는 이름은 영화계에서만 생소할 뿐 현재 세계 연극계에선 가장 거대한 이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 역시 명성이 자자한 그의 '가족 3부작' 중 두 번째로 완성된 희곡 「아버지」를 본인이 직접 각색한 영화화다. (연극으로는 2016년 국내에서 원로배우 박근형을 주인공으로 무대에서 공연된 바 있다) 세계시장을 노리고 프랑스어 인명이나 배경을 영국으로 옮기는 수정이 이뤄진 정도 외엔 원작 희곡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이미 완성형 각본이었던 셈이다. (국내에 희곡 대본집이 출판되어 있어 비교도 가능하다)

전작 <더 파더>의 성공이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플로리안 젤러의 후속작 <더 썬>은 기대치 허들이 지나칠 만큼 높게 설정될 법하다. 그래서 아마도 본 작품이 개봉되고 나면 상당수의 평가는 '괜찮긴 한데 전작에 비해선 좀 심심하다.' 부류가 차지할 듯하다. 물론 <더 파더>에서 안소니 홉킨스에게 아카데미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선사한 그 압도적인 치매노인 캐릭터를 넘어서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그리고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역시 그러할 테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사항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전작의 아우라를 넘어서지 못한다고 <더 썬>이 굳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고 보인다. 우선 하나의 거대한 연작 트릴로지 안에서 본 작품의 위치가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영화의 핵심배경이 가져오는 시사성을 간과할 수 없다. 요즘 '금쪽이' 논란에 휩싸인 한국사회 현실에서 이 영화가 표현하는 문제의식은 심도 깊게 논의될 구석이 차고 넘친다.

성공의 길목에서 '자식'이란 암초를 만나다
 
 영화 <더 썬>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는 뉴욕의 변호사 피터. 재혼한 그는 아름다운 아내 베스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둘째 테오와 함께 만족스러운 일상을 보내는 중이다. 예비 선거를 앞두고 유력 상원의원에게 스카우트 제안도 받은 상태다. 그래서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워싱턴 정계로 진출할지 여부를 놓고 긍정적으로 고민 중이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어 보이는 인생의 전환점에 행복한 비명을 지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이다.

하지만 이혼한 첫 아내 케이트에게서 급한 연락이 도착한다. 엄마와 살고 있는 첫 아들 니콜라스에게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몇 달 째 학교에 등교하지 않고 있다는 것. 아침에 집을 나서지만 실제로는 출석하지 않고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이중생활을 하는데다, 걱정하는 엄마를 속을 알 수 없는 반항기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볼 때는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공포심마저 느껴진다는 케이트의 전갈이다. 케이트는 니콜라스가 아빠를 그리워하는 것 같으니 대화를 좀 해보라고 피터에게 요청한다.

피터는 썩 내키지는 않지만 니콜라스와 만나서 대화를 나눈다. 아들은 아빠와 함께 지내고 싶다고 청한다. 아내 베스는 전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니콜라스가 함께 사는 것을 내켜하지 않지만 남편의 간곡한 눈빛과 절박한 상황 설명 때문에 마음을 돌리고 집의 손님방에서 니콜라스가 머물도록 허락한다. 아들은 기뻐하며 아빠와 새엄마, 이복동생과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새 학교로 전학수속도 완료한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니콜라스는 상대적으로 이전보다 안정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니 니콜라스는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애써 숨겨왔을 뿐이다. 그는 아빠와 살기 시작한 후에도 이전처럼 학교수업에 참석하지 않고 적당한 거짓말로 위장생활을 이어간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칼로 팔뚝에 상처를 내는 자해를 멈추지 않는다. 일에 바쁜 피터와 달리 집에서 어린 아기를 돌보며 일상적으로 니콜라스를 상대해야 하는 베스는 점점 더 그런 니콜라스의 이중성에 불안해한다. 그리고 피터 역시 상황의 전모에 대해 뒤늦게나마 파악하게 된다. 부자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가족 3부작', 연극에서 영화로 변신하다
 
 영화 <더 썬>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극작가로 이미 대단한 성공을 이미 거둔 감독은 희곡에서 영화로 활동영역을 확장하는데 도전한다. 그 첫 순서로 자신의 대표작 '가족 3부작' 시리즈를 차례로 영화화하는 중이다. 이 가족 시리즈는 3부작으로 구성된다. 2010년 「어머니」 - 2012년 「아버지」 - 2018년 「아들」로 이어지는 연작을 통해 작가로서 현대사회의 인간군상을 각각 장년기-노년기-청소년기로 나누고 이를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성공적으로 풀어내는데 성공했다. 이미 연극으로 성공을 거둔 이 연작은 이제 새로운 각색을 거쳐 차례로 영화화 진행 중이다.

희곡 연작 탄생 순번과 영화화 순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희곡은 엄마 ⇒ 아빠 ⇒ 아들 순서이지만 영화화는 아빠 ⇒ 아들 ⇒ (엄마) 순서로 진행되는 중이다. 원 3부작 순서와 달리 '엄마' 편이 대단원의 마무리가 되는 셈이다. 물론 원작에서도 세 이야기는 서로 다른 배경으로 진행되지만 크게 묶어보면 세계를 이루는 각자의 단면처럼 읽혀진다. 현대사회에서 그 비중이 꽤나 약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혈연으로 결속된 원초적 공동체인 가족이라는 소우주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 내밀한 밀폐공간 속에서 표현되는 심리묘사의 무게감과 밀도를 이용해 희곡과 영화 모두 현대가족 풍속도를 그려낸다. 고도로 추상화된 가족 구성원 개별 군상이 매 작품마다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하나의 소우주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기분이다.

<더 파더>는 성공적인 인생을 거쳐 황혼에 접어든 주인공이 치매에 걸려 무너져가며 벌이는 몸부림과 함께, 치매 당사자를 돌봐야 하는 주변 가족과 돌봄 종사자 인력의 관계 및 심리묘사에서 현존 최고봉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후속에 속하는 <더 썬> 또한 작품을 통해 보여주는 이혼가정의 방황하는 청소년 재현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작에 비해 뭔가 약하다는 평판을 듣게 된다면, 두 작품의 설정축이 차이가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테다. 단순비교로는 곤란한 핸디캡을 <더 썬>은 필연적으로 지니기 때문이다.

<더 파더>는 주인공 '안소니'(원작은 '앙드레') 역할을 맡은 대배우 안소니 홉킨스가 혼신의 연기를 펼치면서 명예와 지위를 겸비한 주인공이 무너져가는 과정을 장절하게 그려낸다. 거기에 올리비아 콜만 등 안소니 홉킨스에 맞상대가 가능한 연기파 배우들이 마치 무협지에서 화려한 무공초식을 교환하듯 한바탕 벌이는 연기대결이 불꽃을 튀긴다. 그럼에도 영화의 시점은 심리 스릴러처럼 치매로 과거와 현재를 혼란스러워하는 주인공의 심경을 단일 중심축으로 풀어나간다. 그런 골격 덕분에 관객은 압도적인 연기에 실린 당사자의 안타까운 몰락을 당사자에 감정이입하며 관찰할 수 있다.

하지만 후속 작품인 <더 썬>은 결국 온전한 이해에 도달 불가능해 보이는 시한폭탄 같은 아들 니콜라스(원작에선 '니콜라')의 상태가 갈등과 긴장의 핵심을 이룬다. 반면에 관객이 몰입하게 되는 대상은 아버지 역할을 고민하는 피터(원작 이름은 '피에르')에게 맞춰진다. 그 때문에 발생하는 시선의 분산이 집중력과 몰입에 있어서는 근본적인 제약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는 이야기의 리얼리티 확보에서 감수해야 할 몫이다. 감독 또한 자신이 원작의 아들 캐릭터를 그저 자신의 개인적 경험담을 재연하는 존재로 풀어내려 하지 않는다. 40살 가까운 나이에 집필한 원작이 현재의 청소년 문제를 온전히 담아내는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겸허한 태도다. 대신에 그런 위기의 청소년 당사자를 둘러싼 가족의 고뇌가 보다 작가의 포지션에 적절하다는 판단이 확고히 서 있다.

영화 속 가족에서 '금쪽이' 논쟁을 떠올리다
 
 영화 <더 썬>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우리는 오은영 박사가 등장해 기상천외한 금쪽이들의 사정을 해결하며 부딪치는 스펙터클에 시선을 빼앗기곤 한다. 하지만 오은영 박사가 구세주처럼 강림할 때 반대급부로 부모는 '악마화'되는 과정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는 불편한 진실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심심찮게 목격된다. 학교현장에서도 왜 자신의 아이를 오은영 박사처럼 잘 돌보지 않느냐는 학부모들의 극성에 교사들이 힘들다고 한다. 문제를 예방하기보다는 발생 후에 수습하는데 방점이 찍히는 심리상담이 사회적-제도적 해결책을 대신할 수 없다는 우려도 동시에 제기되는 중이다.

사랑과 관심으로 대한다면 다수의 금쪽이 문제는 해결이 가능할 테다. 실제로 자녀를 온전히 챙기고 균형 있게 관리하지 못하는 부모가 적지 않은 게 현실이기도 하다. 부모 자신부터 기본소양이나 자세가 미성숙한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개별의 상황을 무 자르듯 단정할 수 없고, 각자의 관점이나 처한 입장에 따라 해석과 옹호는 제각각이 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더 썬> 속의 주요 캐릭터들에 대한 평가도 그럴 것이다. 아들의 시선을 통해 들여다본 부모는 무책임하다. 유년기엔 금쪽이처럼 귀하게 대하는 것 같더니 어린 나이에 부부 사이의 사랑이 식으면서 결별하는 과정을 목격해야 했다. 이혼 후 자신과 함께 살게 된 엄마는 아들을 물질적으로는 남부럽지 않게 챙겼지만 남편과 결별 후 버림받은 상처를 힘겨워하며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을 자주 내비췄을 테다. 그런 감정의 쓰레기통 역할을 은연중에 아들이 감당해왔다는 암시가 수시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가장 모호한 건 니콜라스의 내심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은 멀쩡하다는 위장술을 펼치지만 소년의 불안정한 내면은 금방 주위에 간파된다. 부모가 일에 바빠서 상대적으로 늦게 들통이 날 뿐이다. 영화 속에서 절묘하게 묘사되듯 수시로 손톱을 물어뜯고 다리를 달달 떠는 것처럼 숨긴다고 숨겨봐야 티가 팍팍 난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렇게 여린 자아에 계속 상처를 받으며 고통을 마치 반사하듯 표출해 주변을 힘들게 만든다. 본인으로서는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절박한 구원요청을 행동으로 드러내는 셈이지만 비언어적 수단의 전달효과는 온전할 수 없다. 보다 보면 한발 차이로 마음이 어긋나게 빗겨가는 광경에 탄식이 튀어나오는 찰나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하지만 외부자의 시선으로 봤을 때, 그런 니콜라스의 태도는 응석이나 어리광에 가깝게 느껴질 구석 또한 적지 않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 부모 모두 바쁘긴 하지만 그를 아끼는 마음엔 의구심이 느껴지지 않게 묘사되기 때문이다. 일생 투자해 꿈을 이루기 직전에 도달한 일을 포기하고 온전히 아들만 바라보며 살 순 없지만, 아빠인 피터가 화가 나서 아들에게 뭐라 하는 것처럼 부모도 각자 자신의 인생을 누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 말이다. 니콜라스 또한 대학진학을 앞둔 나이이기에 충분히 다 컸다고 간주될 법한 상황이다.

이웃집에 점점이 흩어진 '우리 시대의 비극'
 
▲ "더 썬"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그래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평판하는 관객의 잣대는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칠 법하다. 게다가 핀트는 잘 안 맞지만 어쨌든 위기국면에서 뒷짐은 안 지는 부모들에 대해 문을 꼭꼭 걸어 잠근 듯 내성적인 니콜라스의 침잠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오해를 쌓는데 한몫 톡톡히 한다. 그를 둘러싼 3명의 어른들 - 아빠, 엄마, 아빠의 새 파트너 - 은 모두 특별히 니콜라스를 차별하거나 괴롭히기는커녕, 각자 남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애정과 배려를 보인다. 그 정도면 기성세대 시각에선 충분하다고 여겨질 정도다. 모든 이혼가정 자녀들이 영화 속 니콜라스처럼 심각한 불안과 위기에 처하는 것도 아니고, 입시와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충동적 도피를 일삼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히 사회 전반적으로 니콜라스처럼 고립된 채 위기에 노출되는 빈도는 심화일로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영화 속 이야기는 개별의 특수한 사례라기 보단 '현대가족 리포트'처럼 읽혀진다.

그러나 결국 영화의 제목이 된 당사자 '아들'의 입장에선, 이혼한 부모와 새 엄마의 대응이 절대기준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소하는 데 충족되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어쩌면 부모들의 관점에서 '나는 할 만큼 했다!'로 그치는 것 아닌가 하는 반문이 시작되면 상황은 혼돈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누구도 (당사자마저) 아들의 본심을 알 수 없기에 관객 역시 영화 속에서 아들이 보이는 기행에 그저 답답할 수밖에 없다. 어른들 중 중심 역할인 아빠 피터 역시 아들을 사랑하지만 자식에게 온전히 집중하기란 불가능하다. 그에겐 일과 새 가족에 대한 배려가 함께 중요하기 때문이다. 예전 유년시절 화목했던 가족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아들에게 부모의 이혼 이후 펼쳐지는 상황은 수용 불가능한 성격의 것이다. 그렇다고 시간을 행복했던 과거로 되돌릴 수도 없다. 영화를 보다 보면 아들이 바라는 궁극적인 상상의 목표는 과거회귀로만 가능해 보이니 애초 불가능한 목표 설정인 셈이다. 정작 본인도 그걸 깨닫고 있음에도 말이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회복 불가능한 꿈을 희구한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걸 혼자 극복하는 데에는 번번이 실패한다. 그 결과 자기 제어가 불가능한 지점에 도달하고 만 것이다. 부모도 자신들의 현 상황에서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불편한 관계인데다 본인 또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아이를 돌보며 집에 고립된 채 1년간 외출 한번 제대로 못해본 피터의 새 반려 베스 또한 할 말은 차고 넘칠 테다. 그렇다고 니콜라스에게 사회적 평균치를 넘는 대접을 받고 있으니 배부른 소리 그만하라는 건 폭력에 가깝다. <더 썬> 속 인물들의 비극에 대해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족의 사랑으로 극복하라는 공염불은 무의미할 뿐이다. 그렇게 누적된 상황은 마침내 결말로 질주한다. 그런 영화 속 결말은 개별의 특수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비슷한 조건에서 유발된 사례가 곳곳에 일상화된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숱하게 보고 듣고 체험하는 사건사고들의 압축에 가깝다.

원작과 영화의 변주도 흥미로운 관찰대상
 
 영화 <더 썬>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영화는 감독 본인의 희곡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 각색으로 완성되었다. 공연예술에서 매체예술로 표현방식이 바뀌면서 그에 맞는 톤으로 편집이 가해진 정도다. 주요 차이라면 피터가 니콜라스와의 관계 개선에 실패하면서 상기하는 본인 아버지와의 애증이 추가된 정도다. 이 추가부분을 위해 (① 연작의 성격을 강화하기 위해 ② plus 'a'로 팬서비스를 고려해) 원작에는 존재하지 않는 피터의 관계 서먹한 아버지가 새롭게 등장한다. 그 이름은 '안소니', 전작 <더 파더>의 주인공이던 안소니 홉킨스가 역할을 맡았다.

피터는 정계 진출 논의를 위해 워싱턴에 방문해 회의에 참석한 후 무척 오랜만에 아버지를 찾는다. 워싱턴에 거주한다는 건 아버지 안소니가 정계의 거물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피터도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의 삶을 살지만 안소니의 거처는 하인이 시중드는 저택이다. 하지만 성공한 명사인 아버지를 대하는 피터의 표정은 어색하고, 오랜만에 재회했는데도 안소니의 언행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는 짧은 찰나로 그치지만 영화 후반에 주인공이 겪는 딜레마의 기원처럼 읽혀지는 대목이다. 피터가 자신의 부친에게 느꼈던 이중적 태도와 위선을 어느새 자신이 아들에게 드러내 보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의문은 뭐든 친절하게 해설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21세기 관객을 위한 장치로 추가된 셈이다. 서사 구조의 상징화를 위해 다소 전형적인 설정이지만 효과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전작으로 감독의 작품세계에 입문한 이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서비스 컷이기도 하고 말이다.

영화는 이미 세계적 성공으로 검증된 빼어난 원작, (감독 자신이 원작자도 겸하다 보니) 누수 없이 온전히 독해된 출중한 해석과 전개, 호흡이 척척 맞는 유능한 스태프들, 그리고 잘 구축된 배우들 캐릭터의 미덕을 골고루 갖췄다. <더 파더>의 안소니 홉킨스에 비해 <더 썬>의 휴 잭맨 연기가 절대적인 카리스마 면에서 벽에 부딪힐 진 몰라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내는 인간적인 아빠 캐릭터로는 손색이 없다. 비교대상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화 속 휴 잭맨의 연기는 모자란 게 없다. 니콜라스 역의 젠 맥그라스는 불안정한 청춘 캐릭터를 온전하게 소화해낸다. 보고 나면 배우를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위태롭고 절박하면서도 자기방어적인 이미지가 뇌리에 박힌다. 거기에 좋은 면이건 나쁜 면이건 너무나 인간적인 피터의 새 반려 베스 역 바네사 커비 또한 열연이라 해도 좋을 캐릭터 소화를 선보인다. 꼭 덧붙이고픈 건 전작에서 돌봄 종사자들의 고충을 십분 소화했던 것처럼 본 작품에서도 정신과 의료인들의 헌신과 프로의식을 절묘하게 재현했다는 점이다. 관련업계에서 오래도록 교재로 활용될 만하다.

그렇게 영화는 과도한 외부적 조건의 개입이나 시사적 요소, 극단적인 우발 상황 없이도 관객을 2시간 내내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부모와 자식 간의 소통이 날이 갈수록 벽에 부딪히는 현대사회의 딜레마가 이 가족 드라마 속 소우주를 통해 관객에게 답하기 어렵지만 우회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려 대기 중이다.

<작품정보>

더 썬 The Son
2022|영국|드라마
2023.07.19. 개봉|122분|15세 관람가
감독 플로리안 젤러
주연 휴 잭맨(피터 역), 로라 던(케이트 역), 바네사 커비(베스 역),
젠 맥그라스(니콜라스 역), 안소니 홉킨스(안소니 역)
각본 플로리안 젤러, 크리스토퍼 햄튼
음악 한스 짐머
원작 연극 'Le Fils(The Son)' by 플로리안 젤러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제공/배급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