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의료·교육’ 위해…아픈아이 안고 부산행 택한 선교사

2023. 7. 16. 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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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정미현] 올리버 에비슨 내한 130주년 기념
서울을 떠나던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와 그의 부인 제니 반스 에비슨(오른쪽). 연세대학교 제공

“제 아이의 상태가 좋아져서 조선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다면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계속 나아가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그 아이로 인해 탑승이 거절된다면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막는 신호로 여기고 조선으로 가고자 하는 이 계획을 접겠습니다.”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이 언더우드의 요청을 받아들여 의료 선교를 위해 조선으로 떠나고자 했을 때 아기가 성홍열과 합병증으로 열이 너무 높아 여행을 제대로 진행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내와 어린 세 자녀를 데리고 토론토에서 밴쿠버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면서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밴쿠버로 도착할 즈음 아기의 상태가 호전되어 에비슨 가족은 무사히 승선했고 1893년 7월 16일 부산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이들을 제일 먼저 반겨주던 존재는 모기떼였다. 적합한 숙소도 없었기 때문에 매우 비좁았던 베어드 목사(William M. Baird 1862~1931) 집에 여장을 풀고 이들의 조선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올리버 에비슨 부부 내외. 연세대학교 제공

이후 서울에 도착한 에비슨은 당시 조선 관료들이 방만하게 운영하던 제중원을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본격적으로 이양받도록해서 경영의 합리화와 정상화를 도모했다. 그가 뉴욕 카네기 홀에 가서 ‘의료 선교에서의 예양(Comity in Medical Work)’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던 것은 1900년의 일이었다. 7여 년 동안의 치유사역의 경험을 녹여내고 교파 간 연합적 사역의 비전을 제시했던 것인데, 이것이 록펠러와 함께 석유회사를 세워 크게 부자가 된 부호 루이스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1838~1913)의 가슴에 와 닿았다. 이렇게 해서 큰 재정 지원을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의료기관 세브란스 병원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게 된 것이었다.

에비슨은 병원을 효율적으로 운영하였을 뿐 아니라 서양 의학교육의 기초를 단단히 다지게 하였고 연희전문학교에서의 근대 교육을 안정적으로 발전시켰다. 1935년 조선 땅을 떠나기까지 그의 다채로운 사역의 내용과 특성을 다음과 같이 조명해 볼 수 있겠다.

에비슨이 마주한 조선은 신분질서가 강하게 작용하던 계급사회였다. 그러나 에비슨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함을 이론적으로만 설파한 것이 아니라, 몸소 실천한 인물이었다.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을 우리나라 최초의 외과 의사로 만든 것이 그 결정적 증거였다. 공장 노동자였던 에비슨의 아버지는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적절한 휴식시간을 제시하여 생산성을 올리자며 합리적 해법을 제시하는 등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노사가 모두 상생할 수 있는 건설적인 의견을 개진했던 인물이었다. 서양의 기독교 문화를 그냥 이식하려 하지 않고 조선의 낯선 종교와 문화를 배우고 이해하도록 노력하며 존중하였던 태도는 모두 그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이렇게 그는 왕부터 가장 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교제하면서 의료선교사와 교육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에비슨은 연희전문학교 2대 교장으로서 이 땅에 고등교육의 기초를 단단히 다져 나갔다. 오전에는 남대문에 세워진 세브란스 병원장의 역할을 하고, 오후에는 신촌에서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서 일했다. 에비슨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계급차별만 철폐한 것이 아니라, 성차별도 철폐하고자 하였다. 여성 간호교육을 시작하여 여성 전문인력을 배출하였고, 당시 남학생만의 입학을 허용하던 연희전문학교에서 그 배우자들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 여자대학을 세울 계획도 세웠던 것이다. 실제로 이 계획이 재정문제로 모두 실현되지는 못했더라도, 남녀 간 교육의 격차를 줄이고, 여성 전문 인력을 양성하며 성차별을 줄여나가고자 한 것은 결국 연세대학교를 한국 최초의 남녀 공학이 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에비슨은 계급, 성차별의 벽을 허물고자 했을 뿐 아니라 인종차별의 벽도 허물었던 지도자였다. 전 세계적으로 아프리카의 성자로 알려져 있으며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많은 사람에게서 그 이름이 기억된다. 그러나 에비슨은 슈바이처를 능가할 정도의 구체적이고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에비슨은 한국을 떠날 때 세브란스의 병원에 그의 후임으로 소아과 의사이며 교수였던 자기 아들을 세우지 않고 한국인 오긍선에게 그 자리를 물려주었다.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이 교육을 받는 지속가능한 체계를 일찍이 마련하였던 에비슨은 의학과 약학 교재를 한국어로 번역했고 더 많은 사람이 의학적 지식을 효율적으로 전수받도록 힘썼다.

“힘 있고 나쁜 짓을 하는 인접국가인 윗돌과 힘없고 정치적으로 어리석었던 아랫돌”에 짓밟혀 있던 한 나라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힘썼던 에비슨은 조선의 저변에 물리적 생동력이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에비슨은 협력과 연합의 중요성을 이론적으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모범을 보였다.

연세의료원 재활병원 모퉁이에 가면 에비슨이 즐겨 인용했다는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이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않으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올리버 에비슨 선교사가 즐겨 썼다는 성경 구절. 현재 연세의료원 재활병원 모퉁이에 남아 있다. 연세대학교 제공

최고의 선은 하나님의 것이다. 인간은 감히 그 누구도 선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궁극적 선함의 빛에 의지하며 낙심하지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조선을 떠난 이후에도 그 사랑은 이어져서 이승만을 도와 에비슨은 재미 기독교인 친한회의 초대회장직을 맡아 주권을 잃은 조선을 돕기도 했다. 내한 130주년을 맞아 올리버 에비슨과 제니 반스 에비슨의 이름이 우리에게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분들이 기초를 놓은 다양한 일들이 오늘 21세기 전 지구적 도전에 대한 해법 찾기에 새롭게 조명되기를 바란다.

정미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정미현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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