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노선에서 혁명으로 바뀐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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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은 청국의 행태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때 김옥균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청나라 세력을 꺾어버리는 동시에, 그에 추종하는 귀족들의 세력을 빼앗은 후에 우리나라의 완전 자주독립 정치를 수립하자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고, 실현의 최고 목적이었다.
그 첫 번째 현상은 그들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믿었던 박영효의 몰락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와 그의 동지들은 차라리 이목이 소원(疎遠)한 광주에서 병력이나 양성하면 전화위복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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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기자]
▲ 김홍조와 개화파 왼쪽부터 박영효, 김옥균, 이규완, 김홍조이다. 사진의 초상화의 원본은 사진이었으며, 복장도 한복이 아니라 양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
ⓒ 사진제공 김진석 |
김옥균과 그의 동지들은 청국의 행태에 크게 분개하였다.
"그들의 개혁 제1의 목표는 청국으로부터 독립이었고, 그들의 주구(走狗)라고 여기던 사대당을 몰아낸다는 목표는 부수적인 것이었다. 그들의 척화(斥華) 의지는, 의미상의 미묘함이 있기는 하지만, 효종의 북벌정책 이후 오랜만에 처음으로 나타난 탈중화 사상이라는 데에 그 역사적 의미가 있다." (주석 3)
이와 관련 김옥균은 과연 어떤 생각이었는지, 동지이던 서재필의 회고를 통해 알아보자.
그때 김옥균의 생각은 무엇보다도 청나라 세력을 꺾어버리는 동시에, 그에 추종하는 귀족들의 세력을 빼앗은 후에 우리나라의 완전 자주독립 정치를 수립하자는 것이 그의 이상이었고, 실현의 최고 목적이었다. 더욱이 청나라에서 대원군을 납치하였다는 것은 우리로서 참을 수 없는 치욕이라 하여 더욱이 참을 수가 없어 그 세력 구축과 귀족 타파의 깃발을 둘러메고 나서려 한 것이다. (주석 4)
김옥균 등 개화파는 처음부터 물리력을 동원하는 쿠데타나 변칙적인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할 힘이 없었다. 국정개혁이 시급한 데 자신들에게는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외세를 빌려 거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국강병을 통한 점진적인 탈화(脫華)와 사대당의 제거를 꿈꾸던 개화파에 시련이 다가왔다. 그 첫 번째 현상은 그들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믿었던 박영효의 몰락이었다. 부마도위(駙馬都尉)로서 한성판윤의 지위에 있던 박영효는 결국 사대당의 시의(猜疑)로 한성 판윤에서 광주(廣州) 유수(留守)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그와 그의 동지들은 차라리 이목이 소원(疎遠)한 광주에서 병력이나 양성하면 전화위복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 광주유수직 마져 면직되었을 때 그들에게는 일종의 위기감마저 감돌기 시작했고 이때 그들은 비상한 방법, 즉 혁명을 연상했다. (주석 5)
여기에 개화파의 든든한 한 축이었던 민영익이 척신(戚臣)의 인연에 따라 배신의 길을 택하였다. 이즈음 국제정세가 크게 요동치고 있었다. 청국이 안남(安南)사건으로 시작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했다는 소식이다. 이에 따라 서울에 주둔하던 청군의 절반인 1,500명이 철수한 것이다.
김옥균 등은 이같은 정황에서 청국이 조선 문제에 개입할 겨를이 없을 것으로 판단하면서, 이참에 거사하여 친청 수구파를 제거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평화적 수단에 의한 개혁이 불가능해지면서 실력행사에 의한 권력장악으로 전환한 셈이다. 여기에 민씨 일파와 멜렌도르프가 정부의 통화팽창 정책의 실패를 김옥균 등 개화파에 돌리고, 특히 김옥균의 대일차관 교섭을 맹렬히 반대했던 멜렌도르프가 고종을 만나 "지금 조선을 위하여 폐해를 제거하는 일은 당오전(當五錢)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먼저 김옥균을 제거하는 것이다. 군상(君上)에게 모든 일을 속이고 당신들을 해치는 자는 오직 김옥균 한 사람일 뿐이다. 당신들은 어째서 해의 근본을 제거하려하지 않고 그 말단을 다스리려 하는가?" (주석 6)
김옥균은 위기에 내몰리고 있었다. 그 대신 내외의 정세는 우호적인 변화였다. 그는 결심한다.
"내가 수년 동안 평화적 수단으로 각고의 노력을 하였으나, 그 공이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에 이르러서는 사지(死地)에 몰리게 되었다. 앉아서 죽음을 당하느니보다는 먼저 상대를 제압하는 방책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고 홍영식에게 "이대로 수년이 경과하면 조선은 변혁되더라도 다시 조선인이 조선을 다스리기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기우를 누를 길이 없다." (주석 7) 라고 토로하였다.
주석
3> 신복룡, <서재필의 생애와 활동 - 갑신정변까지를 중심으로>, <서재필과 그 시대>, 29~30쪽, 서재필기념회, 2003.
4> 김도태, <서재필박사 자서전>, 108~109쪽, 을유문화사, 1972.
5> 신복룡, 앞의 책, 30~31쪽.
6> 김옥균, <갑신일록>, 10월 30일 조.
7> 앞의 책, 11월 1일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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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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