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 대학살 또? 개미들 떠는데…퇴직금 '올인'한 CEO 속내
채권 투자 증가세
작년엔 금리 급등으로 ‘채권 대학살’
채권 투자자들은 날벼락을 맞았다. 채권 금리가 오른다는 것은 가격 하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올해 금리 인상 기조가 마무리되면 채권 가격이 오를 것(채권 금리 하락)으로 보고 투자에 나섰던 개인·기관 등이 대부분 손실에 처한 것이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 11일 기준 올해 서학개미(미국 주식을 사는 개인 투자자) 순매수 1위 종목은 ‘디렉시온 데일리 20년 국채 불 3X(이하 종목코드로 통일, TMF)’ 상장지수펀드(ETF)였다. 미국 장기채의 일일 수익률을 3배로 추종하는 레버리지 상품이다. 서학개미들은 이 상품을 올해 들어 무려 6억5042만 달러(8318억원)어치 사들였다. 이 상품은 지난 11일 기준 연초 이후 12.7% 하락했다. 연초 한때 최대 30%까지 상승하긴 했지만 상승분을 모두 반납한 상태다. 지난해에는 기준금리 급등으로 ‘채권 대학살’이 발생하면서 TMF ETF 가격이 72%나 고꾸러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금융투자업계에선 ‘채권의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솔솔 피어나고 있다. 최근 대기업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난 A씨는 퇴직금으로 10·20년 만기 국고채를 전부 사들였다고 했다. A씨는 “주식을 선호하는 성향이 아니어서 대체 투자자산을 찾던 중 채권 투자를 결심했다”며 “몇 년 후 물가와 금리가 낮아질 때쯤이면, 웬만한 주식보다 높은 수익을 내지 않겠냐”고 말했다. 이번엔 진짜 기준금리가 ‘정점’에 가까워졌다는 금리 정점론이 부각되면서 채권 투자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고 있다. 하반기 경기 침체 우려로 주식 시장이 약화하고 채권 시장이 피난처로 부상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 때문에 고액 자산가 등 개인 투자자들이 채권 투자에 뛰어드는 추세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개인 투자자들은 채권 19조2371억원어치를 순매수한 것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5조992억원에서 무려 4배 가까이 증가한 수준이다. 연초 이후 이달 12일까지 개인 투자자들이 순매수 한 금액은 24조8108억원으로, 지난해 개인 전체 순매수 규모(20조6113억원)를 이미 넘어섰다. 특히 이달 들어 국내외 채권 금리가 연고점을 돌파하면서 ‘채권을 매수할 적기’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최근 채권 금리가 급등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지난달 미국 연준이 ‘두 번의 금리인상’을 예고했다. 6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 의사록에서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이 ‘2회 추가 인상’ 가능성을 언급하며 7월 이후에도 금리 인상을 이어갈 수 있다는 우려가 퍼졌다. 새마을금고가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대응을 위해 채권을 대량 매도한 점도 시장 불안감을 키우며 채권 금리를 밀어 올렸다. 하지만 금융투자업계는 채권 금리의 추가 상승은 제한적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박준우 KB증권 연구원은 “지난주 미국 10년물 금리가 4%를 넘어섰는데, 단기적으로 투자 리스크는 있지만 4.2%를 넘어설 정도로 상승은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채권 금리가 거의 정점에 도달했고, 앞으로 기준금리가 인하되면 채권 금리가 내리면서 채권 가격이 상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중론이다. 김지만 삼성증권 연구원은 “올해 하반기 미국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률이 낮게 유지되는 상태) 추세를 시장이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의 금리 상승을 매수 기회로 삼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실제 미국 노동부는 지난달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전년 동월 대비 3% 올랐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9%를 넘어섰던 CPI가 3% 수준으로 빠르게 안정되면서 연준의 기준금리 인상도 조만간 마침표를 찍을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미 연준이 이달 금리 인상을 단행해도, 당분간 국내 기준금리에 미칠 영향이 낮다고 본다. 국내 6월 소비자물가가 2.7%를 기록해 한국은행의 목표치인 2%에 가깝고, 원·달러 환율도 1300원을 밑돌면서 안정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13일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3.50%인 기준금리를 동결한 것도 이 영향이다. 남은 금통위에서도 미국의 기준금리보다는 국내 물가 상황 등을 더 중요하게 볼 것이라는 얘기다. 홍춘욱 프리즘투자자문 대표는 “미국의 금리 인상은 당장 한은의 금리 인상이 아닌, 인하의 지연 요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금리 인하기 땐 장기 국채가 유리
하반기 경기 침체가 본격화하면서 채권 시장은 역으로 호황을 누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침체에 따른 기업의 실적 부진이 지속되면 주가 하락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4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캐나다 매켄지 인베스트먼트는 올 상반기 강세였던 주식 시장이 약화하고 채권 시장이 부상할 것으로 예측했다. 블룸버그의 경제학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향후 12개월 안에 미국에 경기 침체가 도래할 것이란 응답은 60%에 달했다. 레슬리 마크스 매켄지 최고 투자책임자(CIO)는 “올해 남은 기간에 경제 지표가 공개되면 투자자들은 침체를 실감하게 될 것”이라며 “채권 시장이 주식 시장보다 상대적 우위에 놓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주식은 경기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채권은 금리의 영향이 거의 절대적이다. 혹여 금리 예측이 엇나가더라도, 만기까지 보유하면 손실 없이 확정된 이자를 챙길 수도 있어 주식 시장의 조정 시 ‘피난처’로 주목받을 수 있다는 시각이다.
올해 개인 채권 매수세는 장기 국채가 견인하고 있다. 올 상반기 개인투자자들의 채권 종류별 순매수 현황을 살펴보면, 국채가 7조389억원으로 가장 많다. 이어 회사채 4조8579억원, 기타 금융채 4조1498억원, 은행채 1조8446억원, 특수채 6366억원 등의 순이다. 개별 종목에서도 장기 국채에 대한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올해 채권 ETF 개인 순매수 1,2위는 모두 30년물 국채 ETF가 휩쓸었다. 각각 삼성자산운용의 ‘KODEX 미국채울트라30년선물(H)’과 KB자산운용의 ‘KBSTAR KIS국고채30년’이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금리 인하기에 들어서면 30년물과 같은 듀레이션이 긴 채권이 가격 상승에 효과적인 투자 수단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유상훈 신한은행 PWM압구정센터 PB팀장도 “자산가들은 요즘 가격이 많이 싸진 2050년물 같은 장기 국채에 대한 관심이 많다”며 “앞으로 1년 뒤쯤 기준금리가 0.5%포인트 내려간다고 가정하면, 10%가 넘는 수익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채권의 수익은 ‘이자’와 ‘매매차익’으로 구성된다. 표면 이자는 고정돼 있지만, 금리 인하로 가격이 오르면 팔아서 매매차익을 거둘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과거 금리 인하 시기엔 이러한 장기채 성과가 탁월했다. 한국투자신탁운용이 집계한 결과에 따르면, 2007년 9월부터 2008년 12월까지 금리 인하기 30년물 국채 수익률은 41.4%에 달했다. 이는 같은 기간 10년물 국채 수익률인 23.8%를 크게 앞지른다. 2019년 7월부터 2020년 3월까지 금리 인하 시기 때도 30년물 수익률(26.6%)이 압도적이었다. 같은 기간 10년물 수익률(11.3%)을 크게 웃돌았다. 그러나 예측이 빗나가면, 그만큼 수익률이 크게 출렁일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홍춘욱 대표는 “올해 개인투자자들이 집중 매수한 국채30년 ETF의 금리 민감도(듀레이션)를 따져보니 무려 28~29%에 달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은 기준금리가 1%포인트 상승하면 채권가격이 28~28% 급락할 수 있다는 의미다. 과감한 금리 하락 베팅이 빗나가면, 쉽게 반토막날 수 있다는 경고다.
단기채(1년 미만)는 금리 인상 리스크에 대처하기에 유리하다. 만일 예상이 빗나가 채권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만기까지 보유해 약속된 이자를 받을 수 있다. 강승원 NH투자증권 연구원은 “우리나라는 빠르면 11월, 늦어도 내년 초 금리 인하가 이뤄질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며 “금리 인하 시기가 지연되고 있다는 점에서 3분기 중 채권 금리 급등기에 단기채를 매수해, 이자수익과 자본차익을 모두 얻는 전략을 고려해볼 만하다”고 했다. 지역적으론 ‘국내’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김영익 교수는 “미국보다 한국의 경제 상황이 좋지 않고, 물가가 빠르게 내려갈 가능성이 커서 금리 인하로 인한 채권 가격 상승 효과가 두드러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배현정 기자 bae.hyunj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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