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왕들이여, 우리는 필드에서 만납시다 [언젠가 축구왕]
살면서 단 한 번도 공을 만져본 일 없던 여성이 축구를 시작했습니다. 축구하면서 접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려 합니다. 함께하면 이렇게 따뜻하고 재밌다고, 당신도 같이 하자고요. <기자말>
[이지은 기자]
운동에 진심인 사람들의 말버릇이 있다. "나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는 나보다 더 해." 나 또한 방어기제의 일환으로 즐겨 내뱉는다. 언제 쓰냐 하면 PT 트레이너한테 공 좀 그만 차라고 혼날 때, 팀 코치 교사에게 공 좀 그만 차라고 혼날 때, 도수치료사에게 공 좀 그만 차라고 혼날 때(혼나는 인생이라 보면 된다)마다 나는 외친다.
▲ 볼 돌리기 게임 중 |
ⓒ 오정훈 |
"전 저보다 더한 사람 처음 봐요. 제 남편이 맨날 저보고 '과하다'고 혀 차는데, 지은님 존재 알면 좋아할 것 같아요."
왜 운동하는 이들은 서로의 극단성을 보며 안심하는가. 이 마음은 '저 사람보단 내가 낫지'라는 우월감의 일종이라기보다는 '나는 저만큼 하진 않으니 지금의 루틴을 유지해도 되겠지'라는 안심의 방어막이라 보는 편이 더 적절하다. '이 정도로 취미에 빠진 내가 엄청나게 이상한 사람은 아니구나, 나만큼(어쩌면 나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 저기 나타났다!' 하는 동질적 친근감.
물론 이런 마음은 운동하는 사람들끼리나 통용되는 것이다. 한여름에 쏟아지는 장대비 속에서도, 한겨울 영하 15도 추위에서도 공을 차러 모이는 우리는 안다, 우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서로뿐이라는 사실을.
▲ 스트레칭 중. |
ⓒ 이지은 |
축구를 하기 전 나는 뛰는 것, 땀나는 것, 소리 지르는 것, 몸을 부대끼며 힘을 겨루는 것 등 축구장 안에서 해야 하는 모든 것을 경멸했다. 눈앞에 타야 할 버스가 지나간다? 횡단번호 파란불이 깜박거린다? 뛰느니 다음 타이밍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다.
욕심이라는 감정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힘을 들여 내 몫을 탐내느니 좀 더 노력하는 다른 이에게 기꺼이 내주는 편이 낫다. 착해서라기보다는 싸우기 싫어서 그랬다. 한정된 에너지를 필요한 데에만 쓰고 싶었다.
이런 내가 지금은 매일같이 뛰어다니고, 구장 안에서 서로를 콜하느라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땀을 하도 흘려 가슴 쪽에 땀띠가 나고 상대편의 등만 보이면 내 자리를 넘보지 말라는 심정으로 한껏 밀어버려서 별명이 '작은 고추'가 되었다. 여전히 1대1 승부는 무섭지만, 그럼에도 전처럼 허무하게 지지는 않는다.
▲ 풋살공 |
ⓒ 오정훈 |
축구왕 아닌 축구왕들이 있어서
이 칼럼 연재의 제목을 '언젠가 축구왕'으로 정했을 때는 내 성장만 기대했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축구왕은 혼자 될 수 없다. 함께 뛰는 내 친구, 매너 좋은 상대편 선수들, 열정과 애정으로 가르침을 주는 스승들까지 모두의 성장이 동반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축구왕'이 아닌 '축구왕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공을 차는 1년여 동안 정말 많은 이를 만났다. 몸 담았던 축구팀과 축구교실, 동네 풋살장에서 만난 인연들과 함께 몸을 부대낀 매치까지, 한 동네 사는 초등학생 2학년부터 고양시에 사는 주부까지, 나를 스쳐 지나간 축구인들을 곱씹어보면 못해도 200명은 족히 넘을 것이다. 그 수많은 이들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본다. 과연 우리가 축구라는 매개가 없었다면 우리가 옷깃 한 번 스칠 수 있었을까?
▲ 처음으로 관람한 여자 축구 게임. |
ⓒ 이지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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