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맞서는 여자들: 알라의 여인들 [진혜윤 교수의 미술, 도시 그리고 여성]
진혜윤(한남대 회화과 교수)
두 개의 흑백 스크린이 멀찍이 떨어져 서로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다. 한쪽은 한결같이 흰색 셔츠를 입은 백여 명의 남자들의 움직임을, 다른 한쪽은 같은 수의 여자들이 검은 베일로 온몸을 휘감은 채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들은 성벽을 세워 만든 요새에서 질서정연하게 이동하는 반면, 여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황량한 사막을 헤맨다.
▲ 환희(Rapture)(1999) 중 일부 |
ⓒ 쉬린 네샤트 |
총 13분 길이의 이 영상은 이란 출신의 시각 예술가 쉬린 네샤트(Shirin Neshat)를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은 흑백 비디오 삼부작 중 <환희(Rapture)>(1999)다. 2000년 제 3회 광주비엔날레 대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위에 묘사한 대로 흑과 백, 문명과 자연, 질서와 무질서, 소통과 침묵, 자유와 억압 등의 이항대립 구조로 구성된다.
▲ 1971년 이란의 테헤란 대학에서 여학생들이 공부를 하고 있다. 이들은 바지는 물론 짧은 치마를 입고 맨 다리를 드러내고 있다. (출처: The Land of Kings) |
ⓒ The Land of Kings |
이란 북서부 카즈빈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네샤트는 1975년 UC 버클리에서 미술 공부를 이어가기 위해 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이 시기 이란은 여성에게 교육과 직업을 추구할 자유를 주었고, 참정권을 부여했을 뿐 아니라, 베일 착용 의무를 폐지했다. 지금으로서는 쉽사리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다. 이것이 당시 팔레비 2세가 통치하던 이란 제국이 추구한 근대화의 방향이었다.
팔레비 왕조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후예임을 강조했지만, 사실 미국과 영국의 지지로 어렵게 왕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왕실이 단행한 이란의 근대화는 친서구적이고, 탈이슬람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에 반해 민심은 이란의 전통적 가치 수호에 집중되었다. 이는 곧 외세 저항적 민족주의 노선의 대규모 반정부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 1978년 12월 10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는 수천 명의 시민이 참여하는 반 팔레비 국왕 시위가 열렸다. 그 결과 1979년 팔레비 국왕은 미국으로 망명하고 호메이니를 최고 지도자로 하는 이슬람 공화국이 수립된다. |
ⓒ AP/연합뉴스 |
하지만 이란의 여성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종교 지도자를 최고 권력자로 추대한 이란 혁명은 한마디로 이슬람 근본주의로의 회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새롭게 수립된 정부는 이슬람 율법에 따라 여성의 교육과 사회 참여 활동을 완전히 봉쇄했고, 종교와 국적에 상관없이 베일 착용을 다시 강제했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의 신체 노출은 남성을 유혹해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는 원천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남성에게 예속된 존재인 여성은 남편 이외의 남성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1991년, 16년 만에 이란을 찾은 네샤트는 자신이 나고 자란 고향의 변화에 큰 충격을 받게 된다. 학위 취득 이후 결혼과 출산까지 미국에서 해온 그가 고국에서 받았을 충격은 충분히 짐작되는 바다. 이란인이지만 서구식 교육과 문화가 익숙한 그가 '여성'이기에 직면해야 했던 상황들은 그가 작품 활동을 재개하는 계기가 된다. 석사학위까지 취득했지만, 졸업 이후 미술계를 떠났던 그는 동시대 이슬람 여성의 삶에 대한 묵상들을 사진과 영상 작업으로 발표했다.
돌이켜보면 그가 미술 공부를 시작한 70년대 중반의 미국은 페미니스트 운동이 무르익은 시기다. 이에 발맞춰 일어난 제1세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은 캘리포니아와 뉴욕을 중심으로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 도전하는 작품들을 전개했다. 이들은 여성의 생물학적 특징과 사회적 차별을 연결지으며 여성성의 의미를 재고했다. 이러한 시대적 동향은 캘리포니아에서 수학하고 뉴욕에서 활동을 시작한 네샤트의 작업 행보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네샤트의 이름을 미술계에 각인시킨 작품은 그의 데뷔작인 <알라의 여인들>(1993-1997)이라는 제목의 흑백 사진 연작이다. 이 작품에서 네샤트는 직접 차도르를 쓰고 카메라 앞에 섰다. 차도르란 이슬람 여성들이 착용하는 외투로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 신체 부위 전체를 감싸는 검은 베일 또는 그 착용법을 말한다.
▲ 쉬린 네샤트의 <저항적 침묵>(1994) |
ⓒ 쉬린 네샤트 |
<저항적 침묵>(1994)을 일례로 살펴보면, 차도르를 쓴 네샤트의 얼굴은 파르시어(이란 공용어)로 뒤덮여 있다. 그 앞으로 총이 한 자루 세워져 있다. 하늘을 향해 길게 뻗은 총열이 화면 전체를 세로로 가로지르며 흑백 화면의 이분법적 대비를 극대화한다.
네샤트는 이슬람의 율법에 따라 차도르를 썼지만, 이에 순응하는 모습은 아니다. 그는 소총으로 무장했다. 그의 눈빛은 결의찬 듯 보이지만 불확실함이 남아있다. 그는 유일하게 노출이 허락된 얼굴 위에 사파자데가 이란 혁명 직후 쓴 시 <깨어있는 충성(Allegiance with Wakefulness)>(1980)의 시구를 문신처럼 덧입었다. 순교자의 희생을 칭송하는 시는 "상처받은 몸"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한다. 네샤트의 입술은 굳게 다물고 있지만, 시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는 종교와 전통의 미명 하에 여성을 옥죄는 이슬람 사회의 모순에 맞서는 모습이다.
한편 차도르, 총, 파르시어는 오리엔탈리즘을 상징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차도르를 입은 여인을 향한 성적 환상, 무자비하게 폭력을 행사하는 야만족 또는 테러리스트로 묘사되는 이슬람 세계, 철저히 타자의 언어로 인식되는 파르시어는 모두 서구 사회가 만들어낸 허상이다. 다시 말해 네샤트에게 저항의 대상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와 이슬람의 전통, 이와 더불어 서구 사회의 편견과 차별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것이었다.
▲ 환희(Rapture)(1999) 중 일부 |
ⓒ Shirin Neshat |
이러한 작품 경향 탓에 네샤트의 작품은 단 한번도 이란에서 공식적으로 선보인 적이 없다. 하지만 이란 밖에서 네샤트의 작품은 비서구 하위주체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페미니스트 미술이 서구 백인 여성을 벗어나 다른 인종, 계층, 문화적 차이를 돌보기 시작한 20세기 후반, 그의 작업은 우리 미술계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주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근 그는 자신의 생활 터전인 미국에서 마주하는 모순을 추적하는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의 작업에서 더이상 이란에 대한 향수는 없다. 이제 그의 관심은 이주민과 비이주민, 동과 서, 남과 여 사이의 위계질서를 해부하는 것에 있다. 이란에서 이란 밖으로 확장되었던 그의 작업은 더 넓은 시야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그의 작업의 중심에는 여전히 '믿음'에 맞서는 여자들의 삶이 자리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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