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모의 酒저리]작은알자스, 인생도 와인도 내추럴하게
도시 삶 벗어던지고 농부의 꿈 이루러 한국行
과일 본연의 맛 살린 '내추럴 와인' 생산
인위적 개입 없이 떼루아 특성 그대로 담아
“와인은 단순하다. 인생도 단순하다. 복잡하게 만드는 건 바로 인간인데, 정말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르나르 노블레(Bernard Noblet), 로마네 콩티(Romanee-Conti) 전 양조책임자
파리지앵 부부, 농부가 되다
신이현과 도미니크 에으케(Dominique Herque), 두 사람이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발길을 옮긴 건 단순한 인생을 살아내기 위해서였다. 1994년 장편소설 을 발표하며 등단한 소설가 신이현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파리로 건너갔다. 에펠탑에 새천년을 기다리며 D-1000 카운트다운을 헤아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곳에 정주하려던 것도 아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잠시 머물다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삶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계획을 수정하게 만든다. 친구 따라나선 집들이에서 그는 한 사람을 만났다. 알자스에서 온 파리지앵, 도미니크였다. 신 씨는 “당시엔 지금처럼 ‘한 달 살기’ 같은 개념이 있던 때도 아니었고, 1년 정도 편하게 지내다 올 생각으로 건너갔다”며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프랑스에서 남자를 만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던 신 씨는 2003년 도미니크와 결혼했고 파리에 정착하게 됐다.
그렇게 안정적인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던 어느 날. 컴퓨터 프로그래머였던 남편 에으케 씨는 아내에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렇게 더 이상 계속할 수는 없어. 죽을 것 같아.” 처음엔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마음이려니 했다. 하지만 그는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지금의 일을 접고 오랫동안 원하던 농부가 되기를. 그렇게 그는 나이 마흔에 농업대학에 편입해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 공부를 시작했고, 일을 병행하면서도 결국 졸업장을 따냈다.
신 씨는 농사와 와인을 공부하는 남편을 바라보며 안락했던 인생에 풍랑이 불어닥치는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졸업장을 거머쥔 남편은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부부는 프랑스 남부로 밭을 보러 나서기에 이르렀다. 피레네산맥 인근의 밭을 둘러보며 신 씨는 만감이 교차했다.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외지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낯선 남프랑스 시골에서 평생 포도만 따며 늙고 싶진 않았다. 그는 그곳에서 남편에게 제안했다. 한국으로 가자고. 그곳에서 농사도 짓고 와인도 만들며 살자고.
에으케 씨는 아내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농사와 와인이란 꿈을 이룰 수 있다면 그곳이 어디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어쩌면 평생 이루지 못할 것만 같던 꿈을 이룬다는 게 더 중요했다. 신 씨는 “당연히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20년을 원치 않는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져왔으니 앞으로는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길 바랐다”며 “먹고 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니 굶어 죽기야 하겠냐는 마음으로 단순하게 생각하게 생각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부부는 2016년 프랑스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알자스를 닮은 충주 수안보에 뿌리내려
한국에 들어와선 뿌리 내릴 곳을 찾는 게 우선이었다. 처음에는 신 씨의 고향인 경북 지역을 중심으로 영천부터 경산, 안동, 문경까지 고루 둘러봤다. 이후에는 충북 영동과 괴산까지 살폈다. 하지만 조건을 두루 만족시키는 땅을 찾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없이 땅만 보러 다닐 순 없었기에 우선 양조작업을 할 수 있는 작업실을 찾는 것으로 선회했고,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도자기 공방으로 사용되던 충주의 한 건물이었다. 두 사람은 그곳을 베이스캠프 삼아 첫걸음에 나서기로 뜻을 모았다. ‘작은 알자스 레돔’의 시작이었다.
작은 알자스 레돔이란 이름에는 도미니크 에으케라는 남자의 정체성이 담겨 있다. ‘작은 알자스’는 에으케 씨의 고향인 프랑스 알자스(Alsace) 지방에서 따왔고, 브랜드명이기도 한 ‘레돔(LesDom)’은 불어의 복수정관사 레(Les)와 에으케 씨의 애칭 돔(Dom)을 더해 만들었다. 신이현 작은 알자스 레돔 대표는 “남편의 고향인 알자스의 따뜻함을 이곳에서도 느껴보자는 마음을 담았고, 레돔이란 이름에는 도미니크의 가족이란 의미를 담았다”고 설명했다.
충주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엔 다른 이의 땅을 임대해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농약과 제초제 사용에 길들여진 땅에 화학물질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바이오다이내믹 농법을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그들이 추구하는 친환경 농법을 구현하기 위해선 온전한 그들의 땅이 필요했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가던 차에 같은 충주에 사는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근에 괜찮은 땅이 나왔는데 한 번 둘러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그길로 달려가 마주한 땅을 보고 부부는 첫눈에 반했다.
남쪽을 향해 야트막하게 펼쳐진 언덕에, 앞으로는 확 트여 빛이 잘 들었다.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아 습기로부터 과실을 보호할 바람도 시원하게 불었다. 과일이 자라기에는 너무나 좋은 입지였다. 그토록 바라던 자신들의 밭을 찾게 된 순간이었다. 신 대표는 “주변 환경도 깨끗하고 조용한 게 참 마음에 들었다”며 “이를테면 수안보의 그랑 크뤼 밭이라고 느껴질 만큼 좋은 자리라고 여겼다”고 당시를 돌아봤다.
4000㎡(약 1200평) 규모의 어엿한 밭과 함께 에으케 씨의 꿈도 한층 더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농지의 7할은 포도에, 나머지 3할은 사과에 할애했다. 현재 작은 알자스에는 머루와 청수, 청향, 블랙썬, 블랙아이 같은 국산품종부터 리슬링, 실바너, 캠벨얼리 등 국제품종까지 다양한 포도가 자라고 있다. 홍옥과 홍로, 레드러브 등 스무 종이 넘는 사과도 식재돼 있다.
신 대표는 사람들은 보통 와인을 이야기할 때 양조가 가장 중요할 것이라고 미뤄 짐작하지만 실제로는 농사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 있어 농사가 70%, 양조는 30%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한다”며 “포도에 담긴 떼루아가 와인으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에 밭이 있는 떼루아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친환경 유기농법을 고집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좋은 와인이란, 고유한 떼루아 솔직담백하게 보여주는 와인
“내추럴 와인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이 본래의 와인인데, 오늘날 드문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드넓은 바다의 작은 한 방울과 같으나 오, 이 얼마나 값진 한 방울인가.” 이자벨 르쥬롱(Isabelle Legeron) MW(마스터 오브 와인)
작은 알자스 레돔의 제품은 모두 내추럴 와인이다. 내추럴 와인이란 화학비료나 농약 등 인위적인 개입 없이 유기농법, 바이오다이나믹 농법으로 재배한 포도로 만든 자연주의 와인이다. 양조 과정에서도 첨가제는 물론 양조용 효모도 넣지 않고 천연 효모로만 발효해 포도 본연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데 집중한다. 청징이나 여과 같은 과정 역시 건너뛴다.
부부가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포도와 사과를 재배하고 와인을 양조하는 건 그러한 방식이 자연스러운 농법이고, 자연스러운 양조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신 대표는 지역의 고유한 떼루아를 솔직하고 담백하게 보여주는 와인이 좋은 와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파워풀하고 익사이팅한 맛과 향을 담고 있는 것만이 좋은 와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유명하고 인기 있는 스타일로 만들기 위해 이것저것 인위적으로 더하는 것보다는 다소 소박하더라도 그 마을의 떼루아를 고스란히 담아낸 와인이 더 귀하고 맛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부부도 처음에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유명하고 좋아하는 품종을 모두 심어봤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게뷔르츠트라미너 같은 경우 알자스의 주품종 중 하나이고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품종이어서 심어봤지만 안 되더라”며 “내가 속한 지역과 잘 맞는 품종으로 우리 지역의 햇살과 바람을 맞으며 자란 과실로 만든 와인이야말로 우리 지역의 독특한 땅의 맛이 담긴 자연스러운 와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와인을 두고도 한국 포도로는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없다는 편견을 버리고 열린 마음으로 와인을 대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현재 작은 알자스 레돔의 시그니처 제품 역할을 맡은 건 매출의 절반가량을 담당하는 사과 스파클링 와인인 시드르(Cidre) ‘레돔 시드르’다. 시드르는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이 원산지인 술로 영어로 사이더(Cider),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이다라고 부르는 음료의 원형이다. 한국에서 양질의 사과가 많이 나는 데다 국내에선 보기 드문 유형의 술이란 점이 정통 시드르를 생산하기로 결심한 이유다. 여기에 포도나무를 식재하고 양조에 적합한 열매를 맺기까지 길러내는데 최소 3년가량 소요된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레돔 시드르는 사과 껍질에 붙은 야생효모만으로 발효시킨 술로, 늦가을 수확한 사과가 이듬해 봄 술이 되기까지 최소 5개월 이상 걸린다. 양조용 인공효모가 아닌 야생효모로 만들다 보니 발효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고 무엇보다 일정한 품질관리가 어렵다. 하지만 그 우연성이 오히려 자연스러움이고 내추럴 와인의 매력이라는 게 신 대표의 설명이다.
레돔 시드르 외에도 작은 알자스 레돔에서는 스틸 레드와인, 화이트와 로제 스파클링 와인까지 총 4종이 판매되고 있다. 조만간 스틸 화이트와 로제 와인으로 라인업을 확장할 계획이다. 신 대표는 “앞으로도 과일의 맛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와인을 만드는 데 집중할 생각”이라며 “수수하지만 마셨을 때 편안함을 줄 수 있는 그런 와인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가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구은모 기자 gooeunmo@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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