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없던 삶 손질하니 ‘살맛’ 나는 요리가 되다
오래전 아내를 여의고 23년째 홀로 사는 김광석(83)씨는 젊었을 때부터 딸을 키우며 된장찌개나 미역국 등 간단한 국물 요리를 해 왔었다. 하지만 딸이 독립하고 나서부터는 혼자 요리를 해 먹는 일이 번거로워 주로 무료급식소를 이용하거나 라면으로 간단히 끼니를 때웠다. 음식을 같이 먹을 사람도, 요리해서 나눠 줄 주변 친구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우연히 인천 중구의 성미가엘복지관에서 홀로 사는 노인을 위한 요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걸 알게 됐다. 허기를 채운다는 데 의미를 뒀던 그런 식사 대신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14일 “오래전부터 내 손으로 잡채를 만들어보고 싶었는데 요리 프로그램을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바로 신청했다”고 말했다.
요리라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가 처음 도전한 요리는 감자조림. 칼질에 익숙하지 않았던 터라 날카로운 칼을 들자 덜컥 겁도 났다고 한다. 하지만 복지관 선생님의 도움으로 용기를 내 감자를 서걱서걱 썰어 반찬을 완성했다. 김씨는 “칼질을 할 때 손가락을 오므리고 해야 다치지 않는다는 걸 처음 배웠다”고 미소 지었다.
그렇게 요리 프로그램에 참여한 김씨는 이제 집에서 잡채처럼 제법 까다로운 요리도 척척 만들게 됐다. 김씨는 “요리를 배우다 보니 자신감이 생겨 혼자 도전하고 싶은 음식의 조리법을 찾아보고 만들기도 했다”며 “만들어보고 싶던 잡채는 이웃에게도 나눠줬다”고 말했다.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최고령자 신홍철(88)씨도 “혼자 있으면 제대로 식사를 못 하거나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았는데, 요리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끼니를 챙기게 돼 더 건강해진 것 같다”며 “음식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성취감이 들고 뿌듯하다”고 말했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요리 프로그램에 참여할 계획이라고 했다.
한국은 2025년 노인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를 넘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증가하면서 홀로 사는 노인의 수 또한 가파르게 늘고 있다.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독거노인비율’에 따르면 2000년 127만519명이었던 홀로 사는 노인은 지난해 901만8412명으로 증가했다.
특히 사별, 이혼이나 은퇴 후 홀로 사는 독거노인의 경우 혼자서 끼니를 챙기다 보니 노인 부부보다 결식률이 높다. 명지대 식품영양학과 임영숙 교수팀 조사에 따르면 홀로 사는 노인의 아침식사 결식률은 9.3%로 부부가 함께 사는 노인(3.5%)보다 3배 가까이 높다. 저녁식사 결식률도 배가량 많다.
결식을 자주 하거나 혼자서 밥을 먹는 노인은 사회적 교류가 줄어 우울 또는 불안을 겪을 확률도 높아진다. 대한가정의학회 2021년 보고서를 보면 혼자 밥 먹는 노인의 33.8%에서 우울·불안 증상이 시작됐거나 지속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른 사람과 어울려 먹는 식사, 영양가 있는 음식 만들기 등을 통해 독거노인이 겪는 영양 문제나 심리적 고립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서울 강동구에서 25년간 혼자 지내온 이모(66)씨 역시 평소 이웃과 왕래가 없었다. 별다른 일자리 없이 혼자서 TV나 휴대전화를 보면서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문득문득 외로움과 고립감이 느껴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점차 모든 일에 흥미가 없어지고, 무기력증이 심해지자 인근 동주민센터에 도움을 요청했고, 요리 프로그램을 추천받았다.
집 근처 성가정노인종합복지관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서 그가 처음으로 한 요리는 삼계영양밥과 봄나물전이었다. 생전 만들어본 적 없는 요리에 도전해야 했기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씨는 “재료 손질 단계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지 몰라 걱정이 앞섰다”며 “하지만 강사들이 헷갈리는 부분을 반복적으로 알려주고 프로그램 참여 동료들에게도 물어보면서 하다 보니 어느덧 요리를 완성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요리법만 배운 것이 아니라 다양한 친구도 사귀었다. 복지관에서는 요리뿐 아니라 영양교육, 집단상담 등 프로그램도 매달 함께 진행한다. 이씨는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음식을 만들고 가끔 동네에서 만나 산책도 즐기게 됐다.
복지관 관계자는 “어르신들은 요리를 매개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활동이 없을 때도 서로 전화로 안부를 확인하거나 등산, 산책 등 여러 활동을 함께하고 있다”며 “다른 조원들과도 집 주변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는 등 외부 관계망이 확장돼 자연스럽게 외로움과 우울함이 감소하는 걸 볼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씨는 요리를 통해 생전 얘기해본 적 없던 이웃 주민들과도 활발히 소통하게 됐다. 그는 “예전보다 집에서 요리하는 날이 훨씬 많아졌고 주변 사람들과 얘기하면서 기분이 좋은 날이 많다. 요즘 날도 더워지는데 콩국수 만들기에도 도전해보고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민아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고령의 남성들은 스스로 음식을 만들어 본 경험이 적기 때문에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는 건 중요하다”며 “노년기에 접어들수록 사람들과 교류가 줄어드는데, 노년기에 고립되지 않고 즐겁게 지내는 데 있어 요리 프로그램 같은 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민주 기자 lal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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