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의 고백록] 나를 병들게 했던 야망병

2023. 7. 15.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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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중학생 시절 맨 처음 암기했던 영어 문장이다.

그런 나에게 고발장처럼 접수된 말씀이 있었다.

"나는 네가 살아 있고 활동적이라는 평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계 3:1, 현대어성경) 이게 무슨 말인가.

러시아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창조의 목적은 자기를 바치는 일이다. 소란이나 성공이 아니다. 별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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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야망을 가져라)!” 중학생 시절 맨 처음 암기했던 영어 문장이다. 누구 말인지도 몰랐다. 이 경구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가서도 끈덕지게 따라다녔다. 학교만이 아니었다. 교회에서의 기도는 언제나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아~니 되게 해주소서’로 마무리되었다. 그것도 바이브레이션으로! 거룩의 상징이었고 훈시가 담긴 사이렌이었다. 그때면 어김없이 내 몸도 지진 강도 4.9로 떨었다.

나는 소장도 중장도 아닌 대장이 돼야 했다. 집에 들어서면 또다시 ‘보이스, 비 엠비셔스!’의 변종(變種)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적이 이래서 어떻게 할래. 리어커밖에 못 끈다. 똥지게 지고 똥 풀래?” 그것도 밥상머리 앞에서였다. 서러웠다. 누구는 쏟아지는 잠을 이겨내기 위해 눈꺼풀에 성냥개비를 꺾어 끼웠다고 할 때는 내 작은 두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의 40대. 큰 교회 목사님을 보면 한없이 부러웠다. 큰 목사 앞에 나는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나도 대장 목사가 되고파 몸부림쳤다. 산에 가서 목이 쉬도록 부르짖었다. 나에게도 영감을 달라고. 날밤을 새우며 꼬부랑 영어 단어를 외웠다. ‘아골 골짝 빈 들’은 사라졌다. 유학을 다녀오면 목회도 사역도 다 되는 줄 알았다. 나의 천국은 ‘미쿡’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에게서 길고 긴 편지를 받았다. “당신 속에 ‘괴물’이 살고 있다는 거 알아요?” 내가 그렇게 꿈꾸던 큰 목사는커녕 괴물이 되어 있다니… 충격이었다. 부정할 수 없었다. 내 속에 분노조절 장애가 있었고 일중독의 괴물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치유되지 않은 과거가 나를 감옥에 가두어 두었다. 종신형에 가까웠다. 그놈의 야망이 숙주(宿主)였다.

라틴어 ‘암비티오(Ambitio)’에 뿌리를 둔 야망이 곧 야심(野心)이다. ‘들(野)에 사는 짐승의 마음(心)’ 말이다. 야욕으로 뭉쳐 있다. 자연히 야만성을 띤 이중성으로 다가온다. 그런 나에게 고발장처럼 접수된 말씀이 있었다. “…나는 네가 살아 있고 활동적이라는 평판과는 달리 실제로는 죽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계 3:1, 현대어성경) 이게 무슨 말인가. 개죽음도 아닌 ‘산 죽음(Undead)’이라니.

나는 돌아서야 했다. 아니, 야망을 버려야 했다. 한참 뒤에야 ‘보이스, 비 엠비셔스’ 다음에 ‘그리스도를 위해’(for Christ)’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말을 남겼던 윌리엄 클라크(1826~1886) 일본 삿포로농업학교 교장은 기독교 사상을 전파해 우치무라 간조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돈 권력 명예를 위해 야망을 가지라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요즘 이런 소박한 기도를 매일의 기도로 드리고 있다. “하나님, 나는 대장이 되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으뜸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았고 거창하고 허황된 꿈을 꾸지도 않았습니다. 나는 발을 땅에 디디고 마음을 고요히 다잡으며 살았습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만족하듯 내 영혼 만족합니다.”(시 131:1~2, 메시지성경)

이제 60대를 사는 나는 소요(騷擾)가 아닌 고요, 대장(大將)보다 대장부(大丈夫)가 되는 일에 아름다움이 깃든다는 것을 배웠다. 허황된 꿈보다 소박한 꿈을 꾸고 일상에 만족하는 일이 곧 큰일임을 알았다.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리더이고, 나에게 먼저 감동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내 삶에 감동할 게 없으면 누구도 감동시킬 수 없다.

러시아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창조의 목적은 자기를 바치는 일이다. 소란이나 성공이 아니다. 별것도 아니면서 모두의 입에 오르내리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말했다. 나는 야망이 아닌 소망으로 다짐한다. ‘큰일이 아닌 아름다운 일을 하자.’ 그리고 내가 내게 속삭인다. “‘큰일’ 하려다 ‘큰일’ 날 뻔했다. 그치.” 고요 속에 내가 내게 웃고 있다.

청란교회 송길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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