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 사찰 후원자에서 교회 개척·선교사 후원자로… 은혜로 산다
최병련 제주드림교회 권사
경기도 용인의 한 사찰 앞 공덕비에는 ‘최영춘’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는 사찰 건립의 후원자로 최병련(72) 제주드림교회 권사의 할아버지다. 농업회사법인 제주푸성귀를 운영하는 최 권사 집은 대대로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다. 어려서부터 때마다 불공을 드렸고 어른이 돼서는 최 권사가 직접 큰길에서 사찰 입구까지 이어진 가로등 설치비용을 대기도 했다. 최 권사는 지난 12일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해서는 10년 넘게 천주교 성당에 다니던 제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최 권사 부친은 군인이어서 근무지에 따라 가족들은 자주 이사를 했다. 하지만 최 권사는 맏딸의 ‘특권’이었는지 서울에 있는 할머니 집에서 자랐다. 대학 때 성악을 전공한 최 권사는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2학년만 마치고 국제관광공사(현 한국관광공사)에 입사했다. 8년 정도 근무하다 평소 관심이 있던 패션 쪽으로 눈을 돌려 서울 서초동에 ‘초이 콜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의상실을 개업했다.
손님의 권유로 우연히 명동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최 권사는 “정숙하고 근엄한 성당 분위기가 저를 압도했다”면서 “당시 아이를 혼자 키우는 상황이었는데 성모님이 안고 계시는 아기 예수님이 머리에 깊게 박히면서 하나님을 믿어 보겠다고 결심했다”고 말했다.
최 권사는 1년 동안 교리 공부를 마치고 1985년 소피아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그는 “10년 넘게 신앙생활을 했지만 신부님께 고해성사를 할 때마다 늘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내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면서 “하나님 앞에 솔직해지고 싶었는데 신부님 앞에서는 잘 안 됐었다”고 말했다.
최 권사는 89년 아들 교육을 위해 미국으로 투자 이민을 떠났다. 13년 만에 귀국한 뒤 정착한 곳은 제주도였다. 사업차 미국을 드나들던 최 권사는 2006년 뉴욕에서 운명의 사람을 만난다. 소방공무원을 그만두고 늦은 나이에 신학 공부를 한 뒤 인천에서 개척교회를 하던 최봉진 목사의 부인 김광숙 사모였다. 최 권사는 당시 무역업을 하던 김 사모와 뉴욕에서 함께했던 며칠 동안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고, 함께 현지 미국 교회인 타임스퀘어처치에서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날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내가 얼마나 우매한 자요 큰 죄인인지 깨닫게 됐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나의 죄를 대신하셨음을 느끼면서 오열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하나님은 저에게 개신교로 개종해야겠다는 결단의 마음을 주셨어요.”
귀국길에 오른 최 권사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경기도 가평의 강남금식기도원으로 향했다. 최 권사는 “예수님과 저의 온전한 만남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처음엔 너무 낯설었다. 맨바닥에 앉아 기도하는데 주변에서 통성 기도와 함께 통곡 소리도 들렸다. 시간이 가면서 최 권사도 젖어 들었다. 최 권사는 “기도하면서 내 자아가 깨지는 것을 느끼며 엄청나게 울었다. 하루 다섯 번 예배를 드리면서 무사히 3일 금식 기도를 마칠 수 있었다”면서 “그때 제게 밀려오는 기쁨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주님을 영접한 후 최 권사의 삶과 신앙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그는 “온전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바라보며 대화를 시작하게 됐다”면서 “마음 깊숙이 묻어 두었던 치부와 솔직하지 못했던 제 삶의 이야기를 하나님과 직접 나누면서 제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기도원을 나와 제주도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주변에 가장 작은 교회를 찾아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나중에 알고 보니 교회 내에 분란이 있었다. 그다음 주 예배를 드리러 가려는데 몇몇 성도가 집으로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새로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 데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그들과 함께 6개월의 기도와 준비로 30여명이 모여 중문하나교회를 세웠다. 모두가 가족처럼 함께 열심히 전도하고 봉사하며 주일마다 성도가 늘어가는 기쁨을 맛봤다.
그렇게 중문하나교회를 7년 정도 섬겼을 때 ‘소금 장로’로 유명한 김수웅 장로가 찾아왔다. 김 장로는 “몇몇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하는 데 함께하지 않겠느냐”면서 자신의 자서전을 주고 갔다. 최 권사는 밤새 다 읽었다. 14살 때 북한에서 넘어와 평생 하나님 은혜로 사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동참하겠다고 했다.
동고동락했던 중문하나교회를 떠나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성도가 100명이 넘어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는 교회로 성장한 터라 목사님과 상의한 끝에 교회를 나왔다. 그렇게 소 외양간 같은 창고에서 뜻을 같이한 30여명과 함께 2013년 제주드림교회를 세웠다. 최 권사는 “당시 조그만 한정식집을 할 때인데 주일이면 성도들 식사를 전부 마련해 함께 나눴다”면서 “놀랍게도 10년이 흐른 지금은 아름다운 본당과 제주 ACTS 29 선교 훈련 센터를 건립하게 됐고, 30여분이던 성도는 1000명이 넘었다”고 말했다.
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는 교회학교의 기적이다. 최 권사의 손자 민준(12) 한 명으로 시작한 교회학교는 400명이 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놀라운 기적의 현장이 됐다.
제법 큰 식당을 운영하며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던 최 권사에게 뜻하지 않은 고난이 찾아온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국내 회사에 취직한 아들이 결혼에 실패하면서 손자를 최 권사가 키워야 했다. 그 무렵 최 권사는 경제적으로도 최악의 상황에 내몰려 생계를 위해 뭐든 해야 했다. 그는 “아이가 여섯 살 무렵 아들은 가족과 연을 끊고 미국으로 돌아갔다”면서 “저는 하나님께 손자를 잘 키울 수 있도록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최 권사는 밥벌이를 위해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과거 취미 삼아 취득했던 자격증을 이용해 노인회관을 돌며 웃음치료와 치매예방 교육을 하러 다녔다. 하지만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이 일도 할 수 없었다.
최 권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 제주도살이 초기에 약초지도사 자격증을 따서 산과 들로 다니던 때 들었던 양봉업자들의 말이 생각났다. 꿀을 병에 담는 게 아니라 간편하게 유통하는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휴대가 간편한 스틱 형태의 포장에 100% 제주 야생화 꿀을 담아 팔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제주푸성귀라는 법인을 만들어 가시아방과 허니빈 브랜드로 꿀을 팔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현재는 제법 큰 거래처를 확보하면서 직원 복지에 더 신경 쓸 만한 상황이 됐다.
최 권사는 “많은 고난 가운데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저를 넘어지게 하신 것은 넘어져야 땅을 볼 수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란 걸 알게 됐고, 그 낮아짐으로 예수님이 내미신 손을 감사로 잡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최 권사는 “하나님께서 제게 역사하신 기적 같은 일은 너무도 많지만 그중에 하나만 꼽으라면 제게 귀한 손자, 준이를 안겨주신 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만약 제게 이 귀한 손자를 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준이는 저에게 하나님 바로 다음”이라고 말했다.
최 권사는 100일도 안 됐을 때부터 준이를 안고 새벽 기도를 다녔다. 그 기도의 힘으로 힘든 시기를 버틸 수 있었다. 준이가 가장 먼저 한 말은 ‘아버지’였다고 한다. 최 권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짖었던 말을 들으며 자라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감사하게도 준이는 하나님 품 안에서 한 번도 말썽을 피운 적 없이 하나님을 정말 잘 믿는 아이로 성장했다. 최 권사는 준이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담임 교사에게 전화를 받았던 일화를 들려줬다.
“선생님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니’라고 했던 모양이에요. 준이는 선생님께 화를 내면서 ‘선생님은 공기가 눈에 보여요? 공기가 보이지 않아도 있는 거는 분명하잖아요. 그 공기로 우리가 살 수 있잖아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예요’라고 반박했다고 하더라고요.”
최 권사는 최근 놀라운 주님의 계획을 새삼 깨닫는 일을 경험했다. 개신교 신앙에 문을 열어준 최봉진 목사와 김광숙 사모가 최 권사를 통해 마다가스카르 선교사로 파송된 것이다. 최 권사는 평신도로 13년간 마다가스카르 오지에 교회와 학교를 세우며 선교 사역을 하던 김홍섭 선교사와 오랫동안 교류해 왔다. 고령에 건강 문제로 귀국한 김 선교사가 후임자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최 권사는 김 선교사와 최 목사 부부의 만남을 주선했다. 현지 답사를 다녀온 후 고민하던 최 목사는 기도 중 성령의 부르심을 체험한 뒤 마음을 굳히고 지난해 10월 마다가스카르로 선교사역을 떠났다.
최 권사는 “마다가스카르에 계신 최 목사님의 건강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면서 “먼 길을 몇 시간씩 걸어서 심방하신다고 하는데 그 고생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는 차 한대를 보내드렸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고 말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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