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살려 쓴 청소년 문학... "50대에 홀로 글쓰기 연습했죠"
[김슬옹 기자]
▲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글 비밀문서를 발행한 것을 그린 한글벽화 앞에 선 변택주 작가 |
ⓒ 김슬옹 |
"의병을 모으려면 우리말로 뜻을 잘 밝혀 쓸 줄 알아야 해. 우리 마을만 해도 한시를 읽고 풀 수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을 다 꼽지 않아도 되지만, 한글은 코흘리개들 빼고는 다 떼었잖아. 어려운 한나라 글은 왜적들도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세 뜻을 헤아릴 수 있으나 한글은 깜깜할걸." (8쪽)
한글 의병 동화 <한글 꽃을 피운 소녀 의병>으로 주목받고 있는 변택주 작가를 지난 6월 16일 한글학회 앞에서 만났다. 한글학회 맞은편에는 한글벽화 열 개가 설치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소설의 씨앗이 된 임진왜란 한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선조 국문 교서'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에 선조가 일본군에 포로로 붙잡힌 조선군에게 내렸던 한글 문서로 현재 김해 한글 박물관이 안동 권씨 대종회로부터 위탁받아 전시하고 있다. 교서의 내용을 현대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 선조 언문 교서 원본 전시, 김해 한글 박물관. |
ⓒ 김슬옹 |
그는 평범한 선비였으나 전쟁 중에 이 편지를 보고 실제 일본으로 끌려갈 뻔했던 100여 명의 포로를 구하고 싸움 중에 전사했다(김슬옹 <길에서 만나는 한글>, 마리북스, 301~304쪽 참조). 권탁 장군이 보았던 선조 국문 교지는 그의 후손들이 보관하다가 현재 김해 한글박물관에 위탁 전시 중이다.
변 작가는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임진왜란 때 한글이 큰 구실을 했다는 것과 그로 인해 한글의 힘이 더욱 널리 퍼졌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어 동화를 구상하게 됐다고 한다. 필자도 한글과 의병과 임진왜란을 연결한 것이 흥미로워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사건 전개도 흥미롭지만, 필자의 직업상 등장인물들의 이름과 쉽게 풀어 쓴 표현들이 찰지게 다가왔다. 등장인물 가운데 가상 인물들 이름은 모두 토박이말 이름이다. 겨리, 달음, 막손, 팔매, 밝달, 는개, 바우, 윤슬, 당찬, 옹이, 다솜.
양반들이 지었던 항렬 한자에 따라 지은 이름이 아니었다. 생활 속 살림살이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이름들이었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쓰는 '살림살이'라는 말은 '너를 살릴 때 비로소 내가 살 수 있다'라는 뜻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살림살이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잘 소통할 수 있는 말을 쓰고 그런 말에 바탕을 둔 이름을 자연스럽게 짓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대부분 쉽게 풀어쓴 말들이 술술 읽혔다. 이를테면 "당찬 아재를 비롯해 무술에 밝은 이들이 칼을 꼬나 들고 일본군을 베면서 이 사이를 누볐다"(110쪽)와 같은 자연스럽고 쉬운 표현들이 동화 속으로 더 빠져들게 했다. 물론 국어 전문가인 필자에게도 생소한 말들이 있었다. 이를 테면 "어울림 바라지이 밝달이 입을 열었다"(28쪽)에서 '바라지이'가 그런 말인데 이런 경우는 "바라지이는 꽃잎이 흩어지지 않도록 감싸는 꽃받침처럼 마을을 어우르는 이란 말이다"라고 풀면서 이야기가 진행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니 '바라지하다'는 "음식이나 옷을 대어 주거나 온갖 일을 돌보아 주다"는 뜻이고 사실 여기서 나온 '뒷바라지'라는 말은 늘 쓰던 말이었다. 변 작가에게 이렇게 토박이말 중심의 쉬운 말 살려 쓰기에 나선 까닭을 물었다.
"짧은 학력 때문이죠. 어렸을 때 가슴막염을 앓아 학교에 다니다 말다 하다가 중학교 1학년 중퇴했으니 초등학교를 겨우 나온 셈이죠.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박정희 정권의 한글 전용 정책으로 한자 배울 기회도 없었지요. 어려운 한자를 모르니 쉬운 우리말만 즐겨 쓰게 됐는데 주변 사람들이 말결이 곱다는 소리를 자주 해주다 보니 더 우리말다운 우리말을 살려 쓰게 됐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세종 임금은 평등을 '한 가지'로 풀었다는 걸 알았지요."
그래도 변 작가가 어렸을 때 백일장을 휩쓴 문학 소년인 줄 알았다. 그러나 놀랍게도 본격적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된 건 50대 후반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50대 중반이 넘도록 사실은 일기도 안 썼던 사람이에요. 일기라고는 초등학교 다닐 때 방학 숙제로 나온 거 한 이틀 동안 몰아서 쓴 거 전부였는데 그 일기조사도 날씨가 틀려서 혼났던 그런 기억밖에 없어요. 그런데 패션 쪽 경영인으로 일하다가 은퇴해서 50대부터 법정 스님 얘기를 쓰겠다고 마음을 먹는데 스님이 상당히 따뜻한 분인데 다들 엄하다고 여기고 있어 스님이 따뜻하다는 걸 보여드리려고 글을 쓰겠다고 생각을 해요.
그래서 50 중반 언저리에서 혼자서 글쓰기 연습을 해서 다섯 해 정도를 써서 2010년에 <법정 스님 숨결>(큰나무)을 펴내면서 우리말을 잘 살려 쓰려고 노력을 했죠. 이 글을 읽고 주변 사람들이 말이 쉽고 살아있다면서 칭찬을 해줘서 더 용기를 내서 동화를 쓰게 된 것이지요."
변 작가는 요즘은 우리말 자동 번역기가 돌아간다고 한다. 어려운 말을 들으면 더 쉬운 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온다고 한다. 버스를 탈 때 '환승입니다'라는 소리가 나오면 '바꿔탑니다'가 떠오르고, '보행자 우선'이라고 쓰인 표지판을 보면 '걷는 이 먼저'가 떠오른다는 식이다.
필자가 <법정 스님 숨결> 책을 찾아보니 어느 날 갑자기 동화가 나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343쪽이나 되는 두툼한 책이 그야말로 법정 스님의 숨결이 맛깔스러운 우리말로 살아있었다. "1장. 난 나이고 싶다, 2장. 나밖에 모르면, 3장. 나눈 것만 남는다, 4장. 길을 열라, 나는 자유다"와 같은 큰 제목부터 "맑고 향기롭게, 한 생각 일으키면" 등 소제목, 본문 내용까지 쉬우면서도 눈에 쏙쏙 들어오는 말로 가득했다.
'진실한 말이 지닌 힘'이라는 마지막 글에 "말이 씨가 되니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말은 우리가 오래전부터 익히 들어 아는 말이다. 그 말에 담긴 뜻은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이 말대로 된다는 말이다"라는 구절에 답이 들어 있었다. 변 작가 주장은 어렵고 살림살이에서 멀어진 말들은 당연히 좋은 말의 씨앗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동화는 임진년(1592년) 사월, 일본군이 삽시간에 부산에 있는 성들을 무너뜨리고 거침없이 한양으로 치달을 때 지리산 골짜기에 있는 어울림이라는 마을에 의병장 곽재우의 서신이 도착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울림은 백정, 광대 같은 떠돌이들이 모여 이룬 마을이다. 양반들에게 괄시당하며 살던 마을 사람들은 양반들이 무시하는 한글로 힘을 모아 의병으로 나선다.
우리말과 글을 잘 살려 쓰는 열네 살 겨리는 의병을 모으는 노래를 만들고 한글로 백성들 마음을 울리는 글을 짓는다. 조선에서 귀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여자와 아이, 천한 신분의 백성들이 나라를 위해 힘껏 싸우는데 이 싸움에서 큰 힘을 보탠 것이 바로 한글이라는 것이 이 동화의 줄거리다.
실제 역사에서는 동화만큼 민중 속으로 한글이 파고든 것은 아니었지만, 선조의 한글(언문) 국문 교서가 보여주듯 한글이 백성의 문자, 여성을 비롯한 피지매 계층의 문자로 정립된 것만은 분명하다.
▲ <한글 꽃을 피운 소녀 의병>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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