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선발전, 형을 죽인 사람을 만났다

김성호 2023. 7. 14.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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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11] 제27회 BIFAN <만분의 일초>

[김성호 기자]

▲ 만분의 일초 포스터
ⓒ BIFAN
 
같은 목표에 도달하는 백 가지 길이 있을 수 있다. 북한산 정상에 오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북한산 백운대는 언제나 제자리에 있지만, 그곳까지 오르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는 것이다. 오늘은 이 코스로, 내일은 저 코스로 등산길을 걷는다면, 목적지는 같아도 전혀 다른 재미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 등산이라 하겠다. 어디 등산뿐이겠는가.

영화 또한 마찬가지다. 관객을 감동하게 하기 위해 영화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때로는 흠뻑 눈물을 쏟는 슬픔으로, 배꼽 잡고 웃게 하는 웃음으로, 잔뜩 움츠리게 하는 긴장이며 두려워 숨게 하는 공포로, 또 때로는 눈물과 웃음을 넘는 드라마로 영화는 관객을 움직이는 것이다. 눈물이라 해도 눈물에 이르는 법은 어느 하나가 아니고, 웃음이라 해도 그 웃음엔 수십 수백 가지가 있는 것이니 영화가 관객을 이끄는 방법이란 이렇다 저렇다 쉽게 가둬 말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여기 한 편의 영화가 있다. 한 인간에게 들러붙은 무거운 굴레를 수많은 고통과 노력 끝에 마침내 떨쳐내는 이야기, 트라우마라 불러도 부족하지 않을 상흔으로부터 마침내 일어나는 드라마를 그린 작품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KAFA)가 내놓은 작품으로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작품상을 받은 <만분의 일초>가 바로 그 영화다.

2023년 부천이 선택한 영화 <만분의 일초>
 
▲ 만분의 일초 스틸컷
ⓒ BIFAN
 
영화는 검도 국가대표를 선발하는 3주 동안을 다룬다. 주인공은 김재우(주종혁 분)라는 청년으로, 처음으로 검도 국가대표 상비군에 선발돼 합숙에 돌입한다. 3년 마다 열리는 세계선수권에 나설 5명의 대표선수를 뽑는 것이 합숙의 목표다. 협회는 상비군 선수들을 3주 동안 세상과 격리해 거듭 경쟁하게 하고 매주 하위권에 놓인 다섯 명씩을 집으로 돌려보낸다. 소수만이 살아남는 경쟁 속에서 선수들은 날이 잔뜩 선 채 훈련을 거듭한다.

그런데 재우는 어딘지 다른 선수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여기엔 특별한 사연이 자리한다. 재우는 어릴 적 학교폭력으로 형을 잃었고, 형을 죽인 이가 역시 상비군으로 합숙장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다. 서태수(문진승 분)가 바로 그로, 독보적인 실력으로 모든 이에게 경외감을 자아내는 선수가 아닌가. 재우는 남몰래 태수를 경계하며 그를 꺾기 위해 분투한다.

상황은 녹록지 않다. 잦아들지 않는 감정이야 어찌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루아침에 부족한 실력을 메울 수는 없는 일이다. 태수의 강함은 하루이틀에 완성되지 않은 것이고 재우의 검은 턱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감독은 재우에게 더 가벼워지라 말하고 합숙장에서 만난 동료는 진짜 상대는 저 안에 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원수 앞에서 재우의 마음이 잦아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장 강한 사내를 증오하는 남자의 사연
 
▲ 만분의 일초 스틸컷
ⓒ BIFAN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재우와 태수 사이에 잠든 사연을 하나씩 깨워낸다. 그 사연은 재우가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말한다. 치열한 경합 가운데 트라우마에 발목 잡힌 청년이 발버둥치는 이야기가 곧 이 영화 <만분의 일초>가 되겠다.

기실 트라우마를 떨쳐내는 이의 이야기는 영화의 소재로 그리 새로운 게 못된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 편의 영화가 같은 주제로 만들어졌을 테다. 형제를 잃은 이가 그 상처를 딛고 일어나 복수와 복수에의 극복 사이의 기로에 서는 이야기 또한 얼마나 많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치는 거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목표를 향해 다가서는 길의 중요함을 알고 있는 덕이다. 검도라는 영화에선 좀처럼 다뤄지지 않은 소재가 큰 역할을 담당하고, 국가대표 선발전이라는 설정 역시 제 몫을 충실히 해낸다. 호구와 땀냄새가 스크린 너머로 전해지는 듯한 장면이 없지 않고, 칼이 맞닿는 격렬함과 묵상의 고요함이 어우러지는 순간 또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검도영화라 불러도 부족하진 않을 것인데, 거리와 시간을 다투고 정신을 칼끝에 싣는 이 예술적 무도를 영화로 마주하는 기회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말이다.

<만분의 일초>가 대단한 영화라고 확언할 수는 없겠으나 한국에서 보기 드문 소재로 완성도가 많이 떨어지지 않게 그려낸 색다른 시도라는 점은 인정할 만하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이 영화에 작품상을 내어준 것 또한 바로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 만분의 일초 스틸컷
ⓒ BIF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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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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