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직넘버 90%]③원내정당 16개…유럽 '정치 강국' 덴마크의 '협치'
'대화와 협치' 덴마크의 숙의 민주주의
다당제와 90% 육박한 투표율…협치의 비결
국가경쟁력 세계 1위. 북유럽의 '정치 강국' 덴마크는 원내 정당만 16개에 이른다. 지난달 열린 덴마크 정치 축제 '폴케뫼데(Folkemødet)'에서 목격한 다양한 정치적 목소리는 덴마크 의회인 '폴케팅(Folketinge)'에서 재연됐다. 의회의 다수당이 행정부를 구성하는 의원내각제인 덴마크의 다당제에선 연립정부를 꾸리기 위해 대화와 설득이 필수적인 '정치 스킬'이다. 여기에 90%에 육박한 투표율은 덴마크 의회가 유권자들을 위한 정치의 무대로 자리 잡은 원동력이다. 올해 초부터 선거제도 개편을 전면에 내세워 '정치 개혁'에 돌입한 대한민국 국회가 덴마크 정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14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에 따르면 덴마크는 올해 세계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1위에 올랐다.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1위 기록이다. 정부 효율성(6위→5위)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같은 조사에서 우리나라는 64개국 중 지난해보다 1단계 떨어진 28위였다.
덴마크의 국가경쟁력은 대화와 타협을 기반으로 한 정치가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스벤 올링(Svend Oling) 주한 덴마크 대사는 "덴마크의 경쟁력은 혁신 역량, 사회 안정뿐만 아니라 정당과 이념을 초월해 서로 대화하고, 타협을 추구하는 정치 문화의 영향이 크다"면서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한 덴마크의 정치 문화는 여러 정권을 아우르는 장기적이고 합리적인 해결책을 추구하는 정치적 결정들이 선호되고 있다"고 말했다.
덴마크 정치는 어떻게 협치를 이끌어내나
올해 1월 말 덴마크 정부는 국방비 예산을 증액하기 위해 기독교 공휴일인 '대기도의 날(Great Prayer Day)'을 하루 줄이는 법안을 제출했다. 당시 5만여명에 달하는 군중이 수도 코펜하겐에 모여 330년 된 공휴일 축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군사력 강화가 절실했던 덴마크 정부는 공휴일 축소 법안을 밀어붙였다. 덴마크의 연간 근로시간이 1363시간(한국 1928시간)으로 독일(1349시간)에 이어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점도 고려됐다.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은 연합정부를 구성한 정당과 함께 야당과 대화에 나섰고, 중도 진보 계열의 급진자유당을 설득해 법안을 통과시켰다. 안나 파울린(Anne Paulin·35) 사회민주당 의원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에서 "정부가 대기도의 날을 공휴일에서 제외한 이유는 군비 지출을 늘리겠다는 공약 이행과 함께 복지와 기후 이니셔티브 등을 위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면서 "굉장히 열띤 논쟁 끝에 법안을 처리했다"고 전했다.
덴마크 정치가 타협을 통해 반대 여론을 극복한 사례는 더 있다. 1990년대 후반 덴마크는 연금개혁이 불가피했다. 당시 집권당인 사회민주당은 연금개혁을 추진했지만, 반대 여론에 밀려 철회했다. 하지만 이후 총선에서 승리한 사민당은 야당의 지원을 얻어 연금 개혁안을 통과시켰다. 최희경 경북대 행정학과 교수는 "연금개혁에 성공한 사민당은 4년 후 선거에서 참패했지만, 이렇게 개편된 덴마크 연금제도는 오늘날 최고의 연금 제도로 평가받는다"고 설명했다.
덴마크에선 정치적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면 더 자주 만나 대화하는 것이 관행이다. 과거 개발협력부 장관을 지낸 크리스티안 프리스 바흐(Christian Friis Bach·57) 급진자유당 의원은 "장관 시절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의원들을 사무실로 초대해 협상과 토론을 많이 했다"면서 "당시 제안했던 법안을 논의하던 중 상대방이 조금 다른 아이디어를 냈고, 그것을 포함해 법안을 약간 수정하면서 모든 정당이 찬성해 매우 기뻤던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다당제 연립정부…협치는 필수
1920년 이후 덴마크는 과반 이상의 의석을 얻은 정당이 없어 연립정부가 이어졌다. 현재도 원내 1당을 차지한 사회민주당(49석)이 범우파 자유당(23석), 중도 계열 온건당(16석)과 연정해 정부를 구성했다. 23개 부처 중 득표율을 반영해 사민당 11개, 자유당 7개, 온건당 5개씩 나눠 가졌다. 이같은 다당제에선 협치가 필수적이다. 야당과 타협하고 합의하는 문화가 의회에서 자연스럽게 발달한 배경이다.
이같은 협치는 덴마크의 입법 과정에도 반영됐다. 덴마크 의회에서 발의된 법안은 3단계를 거쳐 통과된다. 먼저 전체회의에 상정해 모든 의원이 법안에 관해 토론한 뒤, 각 상임위로 회부된다. 상임위에선 30일간 세 차례까지 검토를 마친 법안만 채택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공개 청문회와 토론이 이어진다. 입장 차이가 큰 법안일수록 더 많은 토론에 시간을 쏟는다. 이 때문에 덴마크 의회는 연평균 200여개의 법안을 통과시킨다. 우리나라는 지난 20대 국회에서 3195건의 법안이 처리돼 연평균 600여건의 법안이 통과됐다.
덴마크 의회가 대화와 타협의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배경에는 높은 투표율이 한몫을 했다. 덴마크 총선 투표율은 최근 4차례 평균 85%를 기록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조기 총선을 실시한 2022년 투표율은 84.2%였다. 2011년 투표율은 87.7%에 달한 적도 있다. 내각책임제로 총리를 뽑는 선거인 만큼 우리나라 국회의원 총선거와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우리나라 21대 총선 투표율은 66.2%, 20대 대통령 선거는 77.1%였다. 가장 최근 선거인 지난해 지방선거 투표율은 50.9%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크게 높은 수준이다.
매직넘버 90% 이끈 덴마크의 선거제도
높은 투표율의 비결은 국민들의 정치 참여 의지와 선거제도가 꼽힌다. 덴마크는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에 기초한 중대선거구로 국회의원을 선출한다. 우리나라는 한 개의 선거구에서 한명의 국회의원을 뽑는 소선구제인 반면, 중대선거구제는 하나의 선거구에서 여러 명을 선출한다. 총 10개 선거구에서 당선자를 뽑는데, 전체 179석 중 자치령인 그린란드와 페로제도 의석 4석을 제외한 175석을 지역 선거구에서 선출한다. 135석은 지역구에서 뽑지만, 40개는 조정 의석(compensatory seats)이다. 이는 다른 북유럽 국가와 비교해 조정 의석 비율이 높은 편이다. 스웨덴은 349석 중 39석(11.2%), 노르웨이는 169석 중 19석(11.25%)다.
이런 조정 의석은 투표율에 따라 높은 비례성을 보인다. 예를 들면 한 권역에서 5% 득표한 정당의 경우 의석 배정이 불가능하지만, 조정 의석을 통해 175석 중 5%인 8석을 할당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는 크게 폐쇄형과 개방형으로 나누는데, 정당이 선거 전 후보의 순위를 미리 선택하고, 유권자는 정당만 선택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폐쇄형과 달리 덴마크는 개방형 비례대표제다. 정당과 함께 후보 선택도 가능해 유권자의 선택에 따라 당선 순위가 달라진다. 특정 후보자의 득표가 높으면 당선되는 방식이다. 무소속 후보자는 해당 선거구에서 150~200명 이하 선거권자로부터 추천받으면 출마할 수 있지만,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공천 방식은 정당별로 자율적이지만, 대체로 지역구 당원들의 투표에 의해 후보가 결정된다. 다만, 전국위원회가 후보자 명부를 승인하는 등 중앙당의 영향력도 반영된다. 신생 정당일수록 지역 기반이 약해 중앙당 차원에서 후보를 지명한다. 일반적으로 여성이나 소수자 후보 할당을 법으로 정하지 않는다. 정당 자체적으로 더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성별, 연령, 학력, 출신 지역 등을 다양하게 고려해 후보를 공천하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의 선거 제도는 높은 비례성을 보인다.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2% 득표율만 얻으면 원내 의석을 얻을 수 있어 다당제가 가능하다. 카스퍼 묄레 한센(Kasper Møller Hansen) 코펜하겐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는 화상 인터뷰에서 "여러 설문조사와 논문에 따르면 단일 지역구 제도보다 비례대표제에서 투표율이 더 높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서 "당선자가 한 명만 나올 것이 분명한 지역구에서는 투표의 중요성이 크지 않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센 교수는 "정당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혼란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과 매우 가까운 정당에 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면서 "만약 2개의 정당만이 있었다면 유권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14개의 정당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면 자신이 원하는 정당과 가까운 정당을 찾기가 더 쉬워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코펜하겐=이현주 기자 ecolhj@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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