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재 칼럼] 불리하면 침묵하는 윤 대통령의 이중성
[이충재 기자]
▲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참석차 리투아니아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이 12일 빌뉴스 한 호텔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며 기념촬영 장소로 향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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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대통령은 오염수 방류 찬성 입장을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그것도 기시다 총리와 만나서 밝혔다. 국민 대다수가 반대 입장을 보이고, 여야 정쟁으로 나라가 들끓을 때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던 그다. 모두가 대통령의 입을 쳐다볼 때는 고개를 돌리더니 일본 총리를 만나선 속내를 드러냈다. 1년 여만에 여섯 번이나 회담을 하다 보니 흉금을 털어놓는 사이가 된 건가.
언제부턴가 윤 대통령은 불리한 이슈에는 침묵을 지키는 게 당연한 듯 행동한다. 서울-양평 고속도로 특혜 의혹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통령의 처가 문제다. 웬만한 공직자면 해명을 하든, 사과를 하든 뭐라도 한다. 대통령 부인과 장모 등 일가가 상당한 땅을 가진 것도 입길에 오를 일인데, 이 때문에 고속도로 종점이 바뀌었다면 경악할 일이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윤 대통령은 조용하기만 하다.
더 기막힌 건 '일개' 장관이 대통령의 공약을 마음대로 백지화했는데도 아무런 질책도 없는 점이다. 평소 윤 대통령의 성정이라면 당장 감찰과 수사로 치도곤을 낼 판인데 침묵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백지화 발표 전에 누군가와 긴밀히 통화하고 메모하고 했다는 걸 보면 배경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아예 판을 깨라는 지시가 내려진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다.
KBS 수신료 분리 징수 문제도 그렇다. 권력의 '방송 장악' 논란이 거센데도 윤 대통령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다. 국가의 공영방송이 와해될 위기에 처한 게 작은 일인가. 그러고는 해외 순방 중에 수신료 분리 징수와 KBS 이사 해임 건은 빠지지 않고 전자결재를 했다. 대통령의 생각이 어디에 꽂혀있는지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장면은 없다.
관가에서 '듣자생존' 나오는 이유
국정의 거의 모든 사안에서 윤 대통령이 얼마나 '깨알 지시'를 하는 지는 정평이 나 있다. 얼마 전 수능 킬러 문항 배제 지시로 전 국민도 말로만 듣던 실상을 알게 됐다. 얼마나 미주알고주알 지시를 했으면 교육부 장관이 까먹고 있다가 뒤늦게 기억을 떠올리고 석고대죄를 했을까 싶다. 관가에선 대통령 보고 때 '듣기만 한다'고 해서 '듣자생존'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다.
윤 대통령의 선택적 침묵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르거나 손해를 볼만한 사안에는 발을 담그지 않는다는 전략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는 반대가 80% 안팎으로 부정적 여론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 양평고속도로 처가 땅 의혹으로 윤 대통령 지지율은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오염수 방류에 찬성한다고 말할 수도 없고, 처가 의혹에 해명하기도 그러니 아예 입을 닫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이중성은 지지층 결집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되면 거침없이 뛰어드는 데서 확인된다. 노조, 시민단체, 야당 등 반대세력은 '이권 카르텔'로 좌표 찍고 목줄과 돈줄을 죈다. 그러자 지지층에선 "대통령이 이제야 제대로 일을 한다"는 환호가 쏟아진다. 윤 대통령 말과 행동의 기준은 오로지 총선 승리에 맞춰져 있다. 그것이 헌법적 가치의 훼손이든, 국민 생명과 건강에 관련된 것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이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통 큰' 이미지였다. 그 자신도 지지층만이 아니라 반대 진영도 끌어안고 야당과 협치하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었다. 하지만 취임 후 윤 대통령이 보여준 것은 협소하고 협량한 모습이다. 단지 개인의 태도와 성정의 문제라면 너그러이 넘길 수 있지만, 지도자의 잘못된 생각이 국가를 퇴행과 폭주로 몰고 간다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윤 대통령은 국민의 질문을 피하지 않는 법부터 깨우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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