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금도 없이 한국인 내쫓더니…中, 이젠 OLED 인재헌팅
국내 대기업 출신 A씨는 4년 전 연봉 3억원을 주겠다는 제안에 중국의 대형 디스플레이 업체로 이직해 액정표시장치(LCD) 기판 설계 업무를 맡았다. 자녀까지 모두 데리고 중국행을 결정했지만 지난해 말 돌연 이 회사로부터 “더는 일할 수 없게 됐으니 다음 주까지 자리를 비워 달라”는 통보를 받았다. 퇴직금도 받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회사를 나온 A씨는 최근 국내로 돌아와 귀농을 준비 중이다.
한국을 제치고 LCD 시장을 장악한 중국 기업이 최근 현지의 한국 기술진 상당수를 정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LCD 공정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스카우트했던 국내 인력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지자 ‘토사구팽(兎死狗烹·필요할 때는 쓰다가 필요 없을 때는 야박하게 버리는 경우를 빗댄 고사성어)’ 한 것 아니냐는 해석이 나온다.
중국은 LCD를 넘어 국내 기업이 핵심 기술을 보유한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분야에서는 빠른 속도로 한국을 추격하고 있어 인재·기술 유출로 또다시 시장을 내주는 사례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잇따르고 있다.
13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BOE· CSOT·HKC 등 중국의 주요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지난해부터 한국 출신 임직원을 잇따라 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까지 파악된 인원만 최소 100명 이상이다. 이들 대부분은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에서 LCD 기판 설계·생산을 맡았던 인력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원한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3년 전만 해도 중국 주요 디스플레이 회사에 근무하던 한국인 기술자가 300명이 넘었다”며 “최근 OLED 핵심 기술자와 고위급 핵심 인원을 제외한 상당수가 계약 만료 통보를 받거나 무더기로 정리됐다”고 전했다.
업계에서는 LCD 생산기술이 사실상 완성 단계에 접어든 시점에서 이미 시장을 장악한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가 한국 기술자를 내보내고 본격적으로 중국·대만 직원으로 대체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특히 이들 기업 중 상당수는 한국 엔지니어에게 퇴직금조차 주지 않고 쫓아내다시피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직 당시 3년의 계약기간을 보장했으나 중국으로 옮긴 지 1년도 되지 않아 해고된 사례도 상당한 것으로 확인됐다.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는 국내 기술진에게 억대 연봉과 현지 주택, 차량 등을 제공하며 공격적으로 인력을 흡수해 왔다.
중국과 OLED 기술격차 줄고 있는데, 핵심 인력 무방비 유출
이 과정에서 중국 1위 BOE에 매각된 하이디스(옛 현대전자 LCD사업부)와 중국 2위 CSOT에 매각된 삼성디스플레이 쑤저우 공장에 근무하던 임직원 상당수가 현지 디스플레이 업체로 옮겨가거나 그대로 흡수됐다.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등 국내 업체들이 LCD 시장을 지배하던 2010년대 중반 중국 업체들은 이른바 ‘3·3·3 조건’을 제시하며 접근했다. 기존 직장보다 연봉 3배, 계약 기간 3년 보장, 차량·주택·자녀 학비 3대 혜택 제공이라는 파격적인 내용이다.
당시 중국으로 이직했던 한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LG디스플레이·삼성디스플레이 출신이면 나이가 적어도 연봉이 150만 위안(약 2억6000만원)부터 시작했다”며 “BOE나 CSOT의 일부 공장에서는 아예 회의가 한국어로 진행됐을 정도”라고 말했다.
이들의 노하우에 힘입어 중국은 핵심 기술을 빠르게 흡수해 세계 1위 디스플레이 국가로 발돋움했다. 올해 중국의 LCD 패널 생산 점유율은 70%를 넘어 세계시장을 좌우하고 있다. 디스플레이 업계 관계자는 “LCD 패널 가격이 최근 다시 오르고 있지만 이제 공장에서 한국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고 전했다.
LCD를 앞세운 중국의 추격에 한국은 지난해 17년간 지켜왔던 디스플레이 시장 선두 자리를 내줬다. 업계에서는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OLED 분야에서도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국과 중국의 OLED 시장 점유율 격차는 2018년 91.9%포인트에서 지난해 59.1%포인트까지 좁혀졌다. 한때 6년 이상까지 벌어졌던 기술 격차도 2년 이내로 좁혀졌다. 업계는 이르면 5년 안에 중소형 OLED에서 중국이 세계 1위 생산국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한다.
이제 중국 업체의 시선은 국내 OLED 기술자를 향하고 있다. 현재 최대 경쟁자로 꼽히는 BOE에만 한국 출신 OLED 핵심 분야 기술진이 50여 명 근무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BOE는 최근 스마트폰용 OLED 시장에 진출해 삼성디스플레이와 경쟁 중이다. 특히 아직 생산 수율(완성품 중 양품 비율)이 낮아 앞선 OLED 양산 노하우를 가진 국내 기술진 영입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있다. OLED의 경우 기술 난도가 높아 공정의 성패가 핵심 기술 인력이 보유하고 있는 미세한 노하우에 좌우된다.
인재를 빼가고 배치하는 방식도 갈수록 교묘해지고 있다. BOE나 CSOT 같은 중국 기업은 한국 업체가 이직 사실을 쉽게 알지 못하도록 자회사나 연구기관 등을 만들어 한국 인력을 ‘위장 취업’시키기도 한다. 국내 업체로선 퇴사자가 실제 중국 기업으로 넘어갔는지를 쉽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중국의 추격이 거세지면서 국내 업체도 방어에 나섰다. 최근 삼성디스플레이는 BOE를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삼성이 개발한 OLED 디스플레이 특허 4종을 BOE가 무단 도용했다고 본 것이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해외로 산업 기술을 유출했다 적발된 경우는 93건에 달한다. 전체 피해액만 25조원이 넘는다. 디스플레이 분야의 기술 유출이 반도체 다음으로 많았다. 특히 유출된 기술의 60% 이상이 중국을 향했다. 조경엽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아직 정부와 산업계가 핵심 기술 유출을 막을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미래 국가 경쟁력을 결정할 요소인 만큼 철저한 관리와 방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희권 기자 lee.hee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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