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인욱의 문화재전쟁] 한국에 온 ‘인디아나 존스’, 고려왕궁 만월대 지켜
미국 고고학자 랭던 워너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는 여러 명의 고고학자가 투영됐는데, 특히 실크로드와 동아시아 국가들을 돌면서 문화재를 수집한 랭던 워너(Langdon Warner·1881~1955)가 대표적인 모델로 꼽힌다. 현실판 인디아나 존스였던 랭던 워너는 생애 마지막 활동을 해방 직후의 한국에서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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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대표 모델
실크로드·아시아 유물 수집·반출
일제 패망 이후 한국 문화재 담당
만월대에 막사 짓던 미군들 막아
1911년 첫 방한, 고려청자에 관심
1946년 경주 호우총 발굴도 주도
」
한국의 도자기 사랑한 워너 부부
랭던 워너는 여러모로 인디아나 존스와 비슷하다. 그는 동아시아 미술을 전공했고, 하버드대 박물관에서 일했다. 동아시아는 물론 시베리아와 실크로드, 유럽까지 조사했고 동아시아 주요 명품을 미국으로 갖고 가는 역할을 했다. 한동안 미국 주요 박물관의 동아시아 유물 가운데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였다. 그러한 활동은 도굴 문화재의 해외 반출로 이어졌다. 실제로 그는 실크로드 조사하면서 둔황 벽화를 파괴하여 많은 비판을 받았다.
영화에서 인디아나 존스는 아름다운 여인들과 사귀는 독신남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실제 랭던 워너는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사촌과 결혼했고, 둘은 부부 고고학자로 활동했다. 랭던 부부는 1911년에 처음 한국을 방문한 이래 고려청자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을 대표하는 명품이라고 극찬했다. 그 덕분인지 1920년대 미국에서 고려청자 값은 10배 가까이 뛰었고, 지금도 미국 주요 박물관의 한국관을 빛내는 주요 컬렉션이 됐다. 반면 그만큼 많이 한국에서 도굴되는 빌미도 제공했다.
고려청자와의 인연도 잠시, 그는 미국을 대표해서 실크로드와 일본을 주로 다니며 조사했다. 2차대전 때 동아시아 담당 문화재 전문가(모뉴멘트 맨)로 활동하며 미국의 문화재 정책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일본 패망 직후 연합군최고사령부(GHQ) 사령관 맥아더가 그를 특별고문으로 임명하면서이다. 당시 랭던은 도쿄에 머무르며 ‘점령지’ 일본의 문화재 업무를 도맡았고, 미군정이 설치된 한국의 일도 함께 담당했다. 사실상 그 생애의 마지막 업무였고, 당시 한국에 있던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국립중앙박물관 실크로드 유물
일본 GHQ에 특별고문으로 임명된 랭던 워너가 1946년 4~5월에 한국의 문화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방한했다. 때마침 그때 개성 시민들이 격노한 사건이 일어났다. 개성의 상징인 고려 왕궁터 만월대에서 미군들이 트랙터로 땅을 파헤치며 막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에 무지했던 미군들은 만월대를 그냥 공터 정도로 여겼다. 개성 시민들이 들고 일어서도 미군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인이 자신의 역사와 유적을 후손의 운명과 동일시한다는 점을 납득하지 못했다.
자칫 큰 무력충돌로도 이어질 수 있었다. 그때 랭던이 한국에 왔다. 그는 만월대를 답사한 직후 미 8군 사령부에 연락해서 만월대 공사를 중지하도록 했다. 만월대에 미군 막사를 친다는 것은 일본 도쿄 고쿄(皇居)에 미군 막사를 치는 것과 비슷한 일이라고 설득했다.
또 다른 소득도 있었다. 당시 미국 시찰단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오타니 탐사대가 조사한 실크로드 유물이 한국 박물관에 있는 것도 확인했다. 랭던 워너는 1930년대 당시 둔황 불화를 반출하다 상당수가 파괴된 아픈 기억이 있다. 그때문인지 미국 시찰단은 맥아더 사령부에 해당 유물을 특별히 관리하도록 당부했다. 이들 유물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경복궁에 세워진 미군 막사
랭던 워너의 노력에도 미군정의 한국 문화재에 대한 인식은 쉽게 개선되지 못했다. 그가 한국을 떠난 직후 이번에는 경복궁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1946년 6월 미군은 경복궁에 막사를 짓기로 결정했다. 경복궁의 역사성을 모르고 단지 조선총독부 근처의 큰 공터로만 생각한 것이다. 서울 시민들이 강력히 항의했지만, 미군정은 자신들의 통치에 대한 조직적인 반발로 오해했다.
결국 미군은 공사를 강행했고 그 과정에서 박물관 옆문이 허물어지고 국보인 중흥산성쌍사자등(中興山城雙獅子燈)이 넘어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리고 막사에 수도관을 묻으면서 수십 개 초석과 온돌 유물이 드러났다. 하지만 ‘인디아나 존스’ 랭던 워너는 이미 한국에 없었다. 뒤늦게 일본 GHQ에 찾아온 미국 시찰단이 상황을 파악한 뒤에 간신히 진정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의 첫 발굴 참여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해방 후 첫 발굴로 1946년 진행된 경주 호우총을 꼽는다. 하지만 순수한 한국인의 발굴이 아니었다. 고작 2주 정도 진행됐고, 그나마도 조선총독부 박물관장을 지낸 아리미쓰 교이치가 이끌었다. 발굴의 주체는 발굴을 지휘한 고고학자로 기억된다. 이집트 투탕카멘 발굴을 이집트 정부가 허락하고 이집트인이 동원됐지만 발굴을 책임진 영국인 하워드 카터의 업적으로 기억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원래 호우총 발굴은 성립되기 어려웠다. 패망한 일본인에게서 단기간에 고고학을 배우겠다는 국립중앙박물관 측의 주장을 미군정이 거절했기 때문이다. 대신 미군정은 한국 고고학자를 미국에 보내서 체계적으로 공부하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국립박물관 측은 일본 전문가의 참여를 요구했고, 결국 1946년 4월 랭던 워너가 한국에 와서 논의 끝에 허락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바로 그날 당장 짐을 싸서 경주로 내려가 발굴하라는 것이었다.
그가 갑자기 왜 발굴을 지시했는지는 1주일 뒤에 밝혀졌다. 랭던 워너가 경주 호우총 발굴 현장에 직접 나타났다. 일본인을 끼고 발굴하겠다는 한국 측의 고집을 못 꺾는다면 차라리 자기가 한국에 머무는 동안에 직접 보고 확인하겠다는 의도였다. 인디아나 존스의 처음이자 마지막 한국 발굴 현장이었다. 이 발굴을 끝으로 아리미쓰 교이치는 곧바로 일본으로 돌아갔고, 랭던 워너도 경주 유적을 보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그는 이미 60대 중반으로 사실상 은퇴하던 시점이었다.
경주의 호우총 발굴은 50여년간 동아시아와 유라시아 곳곳을 다니며 평생 유물을 모았던 인디아나 존스의 사실상 마지막 발굴 현장인 셈이다. 인디아나 존스가 퇴장한 곳이 한국의 경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인디아나 존스’의 마지막 임무
랭던 워너의 주요 업무 지역은 일본이었기에 한국에 대한 그의 영향은 제한적이었다. 실제로 도쿄 사령부의 맥아더는 1948년에 일본이 한국에서 불법 탈취해간 문화재를 돌려달라는 한국의 청원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자칫 한국의 편을 들면 일본인의 감정을 자극하고 미군 지배에 대한 반발이 일 것이라는 이유였다. 미군정의 일차 목적은 점령지 일본의 안정적 통치였지 한국의 문화재는 아니라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냉전이 심해지면서 미국도 동맹국과 친선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무조건 유물을 본국으로 가져가는 ‘인디아나 존스’ 대신에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며 친선 관계를 높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미국도 한국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지원을 늘려나갔다. 다만 미국에는 한국 전문가가 없었기에 조선총독부 시스템을 유지하고 미국은 록펠러재단을 중심으로 재정적인 지원을 했다.
랭던 워너의 마지막 임무는 일본 유물의 미국 순회 전시를 돕는 것이었다. 그는 한국 문화재 전시도 제안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2년 뒤인 1957년에 실현됐다. 모험 가득한 현실판 인디아나 존스의 생애는 유물 폭파·반출 대신에 공식 전시회를 통한 상대방 이해로 마무리됐다. 그의 이런 변모는 ‘인디아나 존스’ 시대의 종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최종 임무가 한반도였다는 점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2차대전 직후 냉전의 핫스팟이 한반도였기 때문이다.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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