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냉매 없이 특수 소재로 잡는 습기, 더위까지 같이 잡는다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52〉 휴마스터 이대영 대표
7월,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습도가 온종일 70~80%에 달한다. 한낮의 기온은 30도를 넘어선다. 이럴 때 쓰는 말이 찜통더위, 푹푹 찐다는 표현이다. 장마가 지나고 본격적인 땡볕이 기승을 부리면 불볕더위다. 비가 내리진 않지만, 습도는 여전히 70%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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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도 낮춰 제습하는 방식 탈피
특수 고분자 흡습제 필터 이용
결로·곰팡이·냉방병 걱정 덜어
공공 건물 냉방 대안으로 주목
」
지중해를 낀 아테네와 아시아의 끝 서울은 같은 듯 다르다. 북위 37~38도, 같은 위도에 걸쳐 있으면서 여름 평균 기온도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습도는 정반대다. 서울은 여름이 시작하는 6월에 70%의 습도로 시작해 한여름 80%를 넘었다가 9월에 들어서야 70% 초반으로 돌아온다. 반면 아테네는 6월에도 60% 미만이지만 7, 8월엔 40%대로 떨어진다. 지중해변 도시들이 서울과 같은 높은 여름 기온에도 훨씬 쾌적한 이유다. 한여름 바람 부는 오두막 그늘이 상쾌한 것도 같은 원리다.
KIST 연구가 창업으로 이어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연구원 창업기업 휴마스터는 이런 ‘더위와 습도의 상관관계’ 에 착안한 딥테크(deep tech) 스타트업이다. 온도는 놔두고, 습도만 낮추는 게 휴마스터 제습의 특징이다. 회사 이름 휴마스터도 ‘습도’(humidity)와 ‘장인’(master) 두 단어를 조합해 만들었다. 주력 제품의 이름은 ‘휴미컨’, ‘습도를 조절한다’(humidity conditioning)는 의미다.
기존 에어컨도 습도를 잡지만 원리가 다르다. 에어컨의 제습은 공기 중 수분이 냉매가 지나가는 차가운 곳에 닿아 응결되는 현상을 이용한다. 에어컨이 실외기를 통해 물을 떨어뜨리는 이유다. 시중에 나와 있는 제습기 역시 에어컨과 같은 원리다. 휴마스터의 제습은 냉매 없이 특수 고분자 제습 소재를 필터로 이용해 수분을 잡는다. 식품 포장재 속 수분 흡수제 실리카겔과 같은 원리이지만, 이보다 5배 이상의 세계 최고 수준 흡습력을 지녔다. 기존 에어컨에 쓰는 압축기와 응축기가 없기 때문에 전기도 40% 이상 적게 든다. 냉매와 결로 방식이 아니어서 기존 에어컨의 골치인 곰팡이 문제에서도 자유롭다.
이대영(58) 휴마스터 대표는 KIST 연구원 출신이다. 서울대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1994년부터 KIST에서 근무하다 스타트업에 전념하기 위해 정년을 8년 앞둔 지난해 퇴직했다. KIST에선 열유동제어연구센터센터장과 도시에너지연구단 단장 등을 역임했다. 평생 해오던 연구가 창업으로 이어진 셈이다.
서울 성수동 성수에이원센터 7층에 자리한 휴마스터 본사를 찾았다. 회의실로 들어서니 천장에 커다란 실링팬이 돌고 있었다. 에어컨은 가동되지 않았다. 한쪽에 놓여있는 온·습도계가 온도 29도, 습도 35%를 알렸다. 섭씨 29도면 일반적으로 에어컨 없이 힘든 기온이지만, 재킷을 벗고 셔츠 바람으로 앉으니 더운 기운을 느낄 수 없었다. 실링 팬 위로 시스템에어컨과 유사한 모습을 한 ‘휴미컨’이 보였다.
이 대표가 가로축은 온도, 세로축은 습도를 나타낸 표를 보여줬다. 가로축의 온도가 같더라도 습도 차이에 따라 체감온도의 차이가 발생한다는 의미였다. 달리 말하면 섭씨 32도의 온도에 습도가 10~20%인 구간과, 27도 온도에 습도가 50~90%인 구간의 체감온도는 비슷하다는 얘기다.
이 대표는 “지금의 에어컨은 온도와 습도를 같이 낮추느라 실내 온도를 지나치게 떨어뜨리고 이 때문에 사람들이 냉방병에 시달린다”며 “습도만 떨어뜨리면 에어컨을 끄거나 약하게 작동해도 훨씬 적은 에너지로 더 쾌적하고 건강한 여름을 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한반도나 동남아시아, 미국 동부 등 습도가 높은 한여름을 가진 지역이 휴마스터의 주 타깃이다.
휴마스터의 제습기가 가장 절실한 곳이 떠올랐다. 여름철 실내 기온 28도를 규정으로 지켜야 하는 정부와 공공기관, 국립대학 건물들이다. 문제는 에어컨의 온도를 28도로 맞춰 놓으면 제습이 잘 안 된다는 점이다. 에어컨 내부가 차갑지 않아 수분 응결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근무하다 보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업무 효율이 떨어져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여름철 대한민국 공무원들이 쏟아내는 하소연이다.
서울시 테스트베드 실증사업 통과
휴마스터는 여러 공공기관으로부터 기술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신기술인증(2017년)과 신제품 인증(2021년), 중소벤처기업부의 우수성능인증(2020년), 환경부의 녹색기술 인증(2017년)이 그것이다. 지난해엔 조달청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 우수조달물품’ 지정까지 받았다. 우수제품 지정을 받으면 경쟁입찰 없이도 계약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다. 성능 검증을 위한 서울시 테스트베드 실증사업도 통과했다. 2020년 12월부터 1년간 고척스카이돔 운영실과 서울에너지공사 사무실, SH공사 마곡엠밸리 주민공동시설 등 20곳에 휴미컨을 설치해 테스트한 결과 냉방 에너지 절감에 최대 60%, 실내 미세먼지 개선에 50% 이상의 효과를 거뒀다.
이쯤 되면 최소한 서울시를 필두로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 건물 곳곳에 휴미컨이 본격적으로 설치되고 있을 듯한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대표는 “실증사업 주무기관인 서울경제진흥원을 통해 여러 차례 문의하고 서울시 관계부처에 면담 요청도 해봤지만 아직 진행되는 게 없다”며 답답해했다. 그럼에도 느리지만 성과는 조금씩 나고 있다. 기존 방식의 제습기로 해결 못 한 습도와 곰팡이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특히 밀폐된 채 온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하 공간, 습기가 성에로 변해 얼어붙는 냉동창고 등은 기존의 에어컨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 이런 기술력이 입소문을 타면서 의정부지방검찰청 수장고, 서울대 기술창업플라자, 현대중공업 R&D센터 사무실, 새만금 자동차반도체공장의 사무실과 공장 현장, 경기도 여주시 소재 대순진리교 문서 수장고 등 지금까지 500여 곳에서 휴미컨을 도입했다. 지난해 56억원을 포함해 2018년 창사 이후 100억여원의 누적 매출을 올렸다.
휴마스터의 제습이 세상 유일의 방식은 아니다. 최근 급성장하는 2차전지 생산공장도 같은 원리의 제습기를 이용한다. 습도가 높으면 배터리를 만들 수 없다. 문제는 기존 에어컨과 제습 시스템으로는 축구장 규모보다 더 넓은 면적의 실내 습도를 낮추는 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습도를 낮추려면 온도까지 같이 낮아져야 하는데, 광대한 공장 내부를 이렇게 유지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휴마스터처럼 흡습제를 이용해 제습을 한다. 이 대표는 “배터리 공장에서 흡습제 방식의 제습을 하려면 에너지가 에어컨 방식보다 4~5배 더 들어간다”며 “하지만 휴마스터가 개발한 방식은 에어컨보다 효율적이라는 점에서 차별화된다”고 말했다.
휴마스터가 아직 넘어야 할 산은 높다. 대부분의 건물에 이미 에어컨이 설치돼 있어 추가 비용을 들여 휴미컨을 들이기가 쉽지 않다. 기존 에어컨 제조 대기업들의 견제도 극복해야 한다.
“차라리 내가 직접 해보자”
성공한 창업은 화려해 보이지만, 실상은 춥고 배고프다. 특히나 대학이나 연구소 연구자 출신의 경우 더욱 그렇다. 이 대표는 KIST에 계속 남았다면 우수연구원으로 만 65세까지 근무할 수 있었다. 안락하고 명예로운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에 나선 이유가 뭘까. 그는 “휴미컨을 처음 만든 건 창업 한참 전인 2010년 지역난방공사에 기술 이전을 하기 위해서였다”며 “난방공사가 아파트에 에어컨과 함께 설치할 시스템을 만들다가 사업화하는 데 실패하는 바람에 ‘차라리 내가 직접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 창업하게 됐다”고 말했다.
윤석진 KIST 원장은 “이 대표는 그간 외부 기업들과 KIST의 기술을 선제적으로 산업화하는 연구를 꾸준히 해왔다”며 “이런 노력이 쌓여서 KIST 기술 기반의 휴마스터가 창업될 수 있었고, 독보적인 기술로 인정받아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joo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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