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푸근해지는 동네, 100년 넘은 돌담이 주는 희로애락

글 최은정·사진 유승현 2023. 7. 13.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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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TMI] 옛이야기 지줄대는 인천 긴담모퉁이길

골목을 걷는 것은 동시대를 기억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의 오늘과 내일, 어제가 있다. '골목길 TMI'는 골목의 새로운 변화와 그 속에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다. 이번에는 신흥동에서 싸리재로 이어지는 '긴담모퉁이길'을 거닐었다. 유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지고 서 있는 100년 돌담길엔 세월이 깃든 집과 오래된 나무, 골목길 사람들이 지긋이 나이 들어가고 있었다. <기자말>

[글 최은정·사진 유승현]

 골목길 사람들의 한낮 풍경
ⓒ 유승현 포토그래퍼
추억이 그리움으로
  
   
유월의 따사로운 햇살을 지고 서 있는 100년 돌담길, 긴담모퉁이길에 선 최재용(61) 전 언론인은 아스라한 추억 속을 서성이고 있었다.

"율목동 231번지에서 나고 자랐어요. 인천기독병원에서 율목공원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초입이었는데, 집터에 빌라가 들어섰네요. 1960~1970년대 인천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은 누구나 이 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을 거예요."

가난을 식구처럼 달고 살았지만, 열심히 살아낸 그 시절이 추억과 그리움으로 남았다. 첫새벽부터 까까머리, 단발머리 남녀 학생들이 새카맣게 모여들어 학교로 향했다.

인천시립도서관(현 율목도서관 구관)에 좌석을 잡기 위해 성산교회 앞 언덕을 숨 가쁘게 올라가던 일도 정겨운 추억이다. 겨울철마다 눈이 내린 날이면 집집이 연탄재를 가져다 길 위에 깨뜨려 미끄럽지 않게 만들던 풍경도 아롱아롱 떠오른다. 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박문초등학교 앞에서 군고구마와 고구마탕을 팔던 아저씨.

"둥근 돋보기를 쓰고, 여기저기 밀가루 같은 것이 묻은 거무죽죽한 잠바 차림에 양팔에는 낡은 토시를 낀... 그 아저씨의 고구마탕 맛에 빠져 5~10원만 생기면 그리로 쪼르르 달려가곤 했어요.

긴담모퉁이길.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푸근해지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많은 땅 이름이 한자로 바뀌는 과정에서 원래의 뜻을 잃었습니다. 긴담모퉁이길은 이름과 제 모습을 지킨 귀중한 곳입니다."

시종일관 미소 짓던 그의 얼굴에 저릿한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무성해진 담쟁이넝쿨만 오래된 돌담을 감싸고 있다.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100년 돌담, 긴담모퉁이길엔
세월이 깃든 집과 오래된 나무,
다정한 사람들이 지긋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
아롱아롱한 추억을 품고.
 
 세월이 깃든 돌담길
ⓒ 유승현 포토그래퍼
 
 인천기독병원을 지나 싸리재로 넘어가는 완만한 오르막길
ⓒ 유승현 포토그래퍼
  
신흥동 옛 시장 관사, 긴담모퉁이집

율목공원을 오르는 골목길엔 1930년대 일본인들이 문화주택(文化住宅)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남향으로 넓은 창을 낸 작고 아담한 이층집이 남아 있다. 그중 신흥동 옛 시장 관사(1938년 신축)는 인천에서 이름난 '좋은 집'이었다. 줄지어 선 고급 주택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위치와 규모 덕분이다.

1954년부터 1966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사용했다. 이후 이 주택을 매입해 주거 공간으로 사용한 사람은 '형제사'라는 귀금속 전문점을 운영한 이경부(1924~2018)씨 가족이다. 강화 출신인 이 사장은 광복 직후 배다리 중앙시장 앞 작은 가게에서 시작해 성공을 이룬 뒤 인천의 가장 아름다운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1960년대 중반 극장에서 처음 애니메이션 광고를 상영했을 정도로 사업 수완이 뛰어났다. 2008년 문을 닫을 때까지 인천의 수많은 예비부부가 형제사에서 예물을 맞췄다.

화려했던 번성기를 품고 외진 골목에 물러나 있던 신흥동 옛 시장 관사가 최근 빗장을 풀었다. 2020년, 인천시가 이곳을 매입해 복합문화공간으로 새단장한 것이다. 1층 거실은 건축 당시 원형을 대부분 보존해 문화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공간과 서재로 꾸몄다. 거실 정면은 완전히 개방해 정원과 통하게 하고, 2층은 일본식 다다미방의 흔적을 살려두었다.

운영을 맡은 이원영(55) 관장은 "제물포구락부·인천시민애집~신포시장~답동성당~긴담모퉁이길·긴담모퉁이집을 잇는 '제물포 인문 로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시민들의 발길이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 긴담모퉁이집 : 중구 답동로12번길 10 032-765-0261
 
긴담모퉁이길 주변의 조붓한 골목엔
작고 아담한 이층집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산업화 시대에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운
바지런한 인천 사람들의 거처였을 테다.
빗장을 푼 오래된 집에 오늘의 발길이 이어진다.
 
 긴담모퉁이집의 정원
ⓒ 유승현 포토그래퍼
 
 2층 일본식 다다미방
ⓒ 유승현 포토그래퍼
   
'지켜줘서 고맙다'는 인사

긴담모퉁이길 주변의 조붓한 골목에 최근 옛 정취를 살린 카페가 하나둘 생겨났다. 로얄답동맨션 길목의 '싸이프러스 카페'는 신흥동에서 나고 자란 이찬우(29) 대표의 공간이다. 오래된 집을 새로 꾸며 3년 전 문을 열었다.

건물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지은 전형적인 2층 양옥집이다. 산업화 시대에 대한민국의 경제를 일으켜 세운 바지런한 인천 사람의 거처였을 테다. 이 대표는 남은 것을 최대한 살렸다. 한창때 흔적조차 퇴색해 가는 오래된 집에 젊은 활기를 불어넣었다.

해가 기우는 늦은 오후, 한 노신사가 익숙한 듯 카페에 들어선다. 싱그러운 정원에 시선을 던진 채 커피 한 모금을 들이마시더니 주름진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띤다. 그가 이 대표를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이 집의 첫 주인이에요. 구석구석이 내겐 훤해요. 지켜줘서 고마워요." 노신사는 찬찬히 몸을 일으켜 품에서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꺼내 들고 구불구불 비탈길을 나섰다. 꽃바람, 하늘 그리고 돌담... 좁고 언덕진 길위의 오래된 친구들이 그를 배웅했다.

그날을 이야기하는 이 대표의 목소리에 뿌듯함이 배어난다. "긴담모퉁이길엔 인천 사람들의 추억과 역사가 켜켜이 쌓여 있어요. 이 공간을 꿋꿋하게 지킬 겁니다. 누구나 편하게 오셔서 쉬었다 가세요." 15년 전, 까까머리로 긴담모퉁이길 꼭대기 집을 올려다보던 소년의 뒤로 오래된 풍경이 잠잠히 흐른다.

▶ 싸이프러스 카페 : 중구 제물량로130번길 18 032-777-8993
 
 긴담모퉁이길 언덕의 풍경
ⓒ 유승현 포토그래퍼
 
 싸이프러스 카페의 주인, 이찬우씨
ⓒ 유승현 포토그래퍼
 
희로애락 함께한 예배당 언덕

돌담길의 서쪽, 답동 언덕에 오르면 고풍스러운 로마네스크식 건축물을 만난다. 1897년,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이자 인천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답동성당(사적 제287호)이다. 1937년에 증축됐으며, 한국전쟁 때 일부 훼손되었다가 복원을 마쳤다.

파란 하늘로 솟아오른 뾰족지붕을 향해 올라가면, 미색(微色) 화강석으로 아치형 출입문과 창문을 장식한 붉은 벽돌 건물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그 위용에 언덕을 오르느라 달아올랐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너른 광장을 휘돌아 나온 시원한 바람이 몸의 열기도 식혀준다.

답동성당은 120여 년간 시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박문학교를 설립하고 해성보육원을 운영하며 배고프고 남루한 시절을 견뎌냈다. 1970~1980년대엔 인천 5·3민주화운동과 6월 민주항쟁 등 민주화운동 집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숱한 역사적 부침을 견뎌내고 오늘날엔 웅장한 고전 결혼식이 거행되기도 한다.

인천시는 유구한 역사를 품은 대성당을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새롭게 꾸몄다. 주차·휴게 공간과 야간 조명시설 등을 갖추고, 지하 4층은 신포지하상가와 연결된다. 언덕 아래 인도까지 지그재그로 연결된 산책로 어디에서나 정겨운 옛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길에 서서 기도한다. 다난했던 시간을 뒤로하고 인천의 내일이 더 행복하기를.

▶ 답동성당 : 중구 우현로50번길 2 032-762-7613
  
예배당 언덕에 오르면,
정겨운 옛 도심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길에 서서 기도한다.
행복을 꿈꾸고 희망을 여미는
인천사람들의 내일이 더 행복하기를.
 
 1970년대 박문초 어린이들의 운동장이었던 성당 앞마당
ⓒ 굿모닝인천
 
 126년간 자리를 지킨 답동성당
ⓒ 유승현 포토그래퍼
  
사진 한 컷, 인천의 기억

'긴담모퉁이길'은 신흥동에서 인천기독병원을 지나 싸리재로 넘어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이름만 들어도 푸근한 이 돌담길은 1907년에 놓였다. 일본인들이 축현역(현 동인천역)과 경인가도(배다리 쪽)를 편하게 오가기 위해 낸 우리나라 최초의 신작로다. 새로 난 길, 새로 생겨난 동네는 인기가 좋았다.

일제강점기에 기세등등했던 부윤(현 인천시장)의 관사가 신흥동에 있었고, 광복 후엔 지역 유지들이 터를 잡아 1990년대만 해도 부촌으로 꼽혔다. 오늘 조붓한 긴담모퉁이길에는 세월이 깃든 집과 오래된 나무, 골목길 사람들이 지긋이 나이 들어가고 있다.
 
 밤나무마을 율목동이 부자 동네가 된 것은 ‘쌀’ 덕분이었다. 1906년 농상공부의 허가를 받은 쌀 중개업체인 근업소勤業所가 율목동 55번지에 문을 열면서 부자 동네가 되었다. 쌀장사로 돈을 번 상인들이 당시로선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살면서 ‘밤나무골 새 동네’로 불렸다.
ⓒ 굿모닝인천
 
 옛 인천시립도서관(현 율목도서관 구관)은 잡지조차 흔치 않던 시절, 배움을 닦는 공간으로 사랑받았다. 1958년 전국 최초로 열람실 문을 열어 새벽에 줄을 서서 표를 받아 들어갈 정도로 이용하는 학생이 많았다. ‘야간통금’ 시절, 새벽에 도서관에 가다 잡히면 경찰들도 너그럽게 봐주곤 했다.
ⓒ 굿모닝인천
 
 인천기독병원 주변은 한때 인천의 의료 타운이라 할 만큼 김내과, 이이비인후과 등 크고 작은 십수 개의 개인 의원이 있었다. 그 덕에 약국도 덩달아 문턱이 닳았다.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사람들과 인근 김포, 강화, 옹진 섬 주민들이 시내를 방문한 김에 약을 박스나 봉지째 사 가곤 했다. 번성했던 시절 싸리재(경동, 율목동 일대)에는 양복점이 줄지어 있었다. 한미라사, 김테일러, 화신양복점, 서울라사, 잉글랜드양복점, 자유라사, 신라라사, 백양테일러 등 한창때는 30여 개의 양복점이 성업했다. 이 즈음 인천 극장의 영화 예고편 앞에는 양복점 광고가 몇 개씩 붙었다.
ⓒ 굿모닝인천
 
글 최은정 본지 편집위원│사진 유승현 포토그래퍼
참고 문헌 <인천 이야기 전집 - 격동 한세기 인천이야기>, <골목, 살아지다>
► 취재 영상 보기 (https://youtu.be/5fLQxRFg-yk)
 
 '골목길 TMI : 긴담모퉁이길' 유튜브 섬네일
ⓒ 굿모닝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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