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없다면 삶이 아니다… 죽음에 대한 성찰

김남중 2023. 7. 1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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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죽음: 이토록 가깝고 이토록 먼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 지음, 김정훈 옮김
호두, 716쪽, 3만2000원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죽음에 대한 강의로 유명했다. 이번에 국내 번역된 ‘죽음’은 그가 소르본대학에서 1957∼1959년 두 학기 동안 강의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호두 제공


죽음에 대한 깊고 섬세한 사유를 보여주는 책이 번역돼 나왔다. ‘죽음’은 프랑스 철학자이자 음악학자인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의 죽음 강의를 정리한 책으로 1966년에 출판됐다. 죽음 철학에 대한 기념비적 저작으로 평가받으며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출간됐지만 국내에서는 묵직한 분량과 문장의 난해함 때문에 번역이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이 책의 대중적 판본이라고 할 장켈레비치 대담집 ‘죽음에 대하여’(돌베개)가 소개돼 있다.

고전어와 고전철학 연구자인 김정훈의 번역으로 만나게 된 ‘죽음’은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천천히 읽어가면 무난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읽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죽음을 생각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장켈레비치는 먼저 죽음이 왜 그렇게 난감한 문제이고, 설명하기 어려운지 짚어본다.

“죽어가는 인간이 존재해 온 지 그토록 오래되었는데도, 어째서 죽을 인간들은 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언제나 우발적인 사건에 아직도 익숙지 않은 것일까요?”

“죽음의 관념을 남에게 전해주는 것이 불가능할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내 자신의 최소한의 관념을 갖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입니다.”

종교에 기대지 않고 논리적 언어로 죽음을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는 “한정하고 명확히 하는 것이 말의 사명이라면, 죽음의 유한성의 헤아릴 수 없는 성격은 말에 대한 하나의 도전과도 같다”면서도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시도한다.

그는 죽음을 표현하기 위해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설명을 동원한다. 화가가 빛과 어둠을 통해 형체를 그려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죽음이 없다면 삶이 아니다”라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산 자는 죽을 운명이라는 조건에서만 산 자인 것이죠… 죽는 것만이 살아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어 “죽음이라는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순수하고 단순한 영원과 뒤섞일 테고”, 영원한 현재란 “하나의 끝없는 반복, 밀도도 농도도 없는 하나의 단조롭고 아주 지루한 연속일 뿐”이라고 덧붙인다.


이런 설명을 반복하고 변주하면서 죽음에 대한 이해를 심화한다. 그는 죽음이 삶을 방해하는 것인 동시에 실존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 ‘기관-장애물’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죽음은 삶의 기관-장애물입니다… 살아있는 자는 자신이 저항하는 죽음이라는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바로 이 장애물 덕분에 자기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확실하지만 그 시간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우리 삶을 ‘절반의 열림’이라고 묘사한다. “삶이 한쪽에는 출생 날짜라는 고정점에 붙어 있고, 다른 쪽 끝에서는 죽게 되지만 시각의 우연성 덕분에 반쯤 열린 채로 유지된다면, 그러니까 삶이 반쯤 자유롭다면, 그때는 우리의 계획을 한없이 갱신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므로 삶은 비극적인 것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사람은 현재 및 가까운 미래에 대한 신뢰와 먼 장래에 대한 절망 사이에서 진동하듯이 흔들린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은 ‘둘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인 왕복운동으로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오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분명한 사실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인간의 가장 확실한 미래이면서, 나의 모든 미래 중 가장 먼 미래다. 죽음은 인간의 삶에 꼭 붙어 있지만, 나의 삶에서는 제외돼 있다. 이 격차는 죽음과 나를 분리하기 때문이다. 장켈레비치는 3인칭이나 2인칭이 아니라 1인칭의 죽음을 사유한다. 타인의 추상적 죽음이나 부모의 가까운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내가 죽는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결국 죽는다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인가….

“살아온 삶이 닫히고 완결될 때, 사람들은 자문합니다. 무슨 소용일까? 그래요, 운명의 창공에서 아무개 씨의 이 짧은 산책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리고 애초에 왜 아무개 씨는 영원히 비존재로만 머물지 않고 어느 날 태어난 것일까요? 그리고 태어났으면, 왜 어느 날 존재하기를 그만두어야 할까요?… 도대체 이 모든 것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장켈레비치는 “우리는 유한성의 충만함과 비존재의 영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서 삶을 굳이 시작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쪽에 선다. “죽은 이는 더 이상 삶으로 돌아갈 수 없지만, 살았던 이는 결코 다시는 태어나기 전의 무로 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비실존으로부터 구해집니다.”

죽더라도 나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된다. 그것은 영원한 비존재에서 가까스로 구원되는 기적이다. 또 한 사람이 지상에서 짧게 머물고 갔던 그 세계는 그런 일이 없었던 세계와는 앞으로 언제까지나 달라지는 것이다. “있었던 것은 있지 않았던 것일 수 없습니다.”

장켈레비치는 죽음을 둘러싼 거의 모든 질문을 포괄하면서 독창적인 방식과 언어로 답을 찾아나간다. 죽음이라는 압도적 사실에 맞서면서 기어코 삶의 의미를 구축해내는 지성이 경탄스럽다. ‘죽음’은 거의 60년 전에 나온 책이지만 앞으로 한국에서 죽음을 논의하는 자리마다 끊임없이 불려나올 것이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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