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늬 아버지 뭐하시노…답하기 어려운 12살 마음 담았죠”

나원정 2023. 7. 13. 17:53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2일 개봉 영화 ‘비밀의 언덕‘
장편 데뷔 이지은 감독
12일 개봉하는 이지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 '비밀의 언덕'은 감수성 풍부한 5학년 소녀 ‘명은’이 글쓰기 대회에 나가 숨기고 싶었던 진실과 마주하는 성장담을 그렸다. 사진 엣나인필름

“영화제 관객들로부터 ‘내가 명은(영화 주인공)이었던 것 같다’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나만 아는 성장통, 말하기 좀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던 유년기 일부를 보여주고 싶었죠.”
장편 데뷔작인 영화 ‘비밀의 언덕’(12일 개봉)으로 지난해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청소년영화 경쟁부문), 전주 국제영화제 한국경쟁부문 등에 초청된 이지은(38) 감독의 말이다.
개봉 전 서울 아트나인 영화관에서 만난 그는 “대놓고 ‘너희 아버지 뭐하시노’라고 묻는 영화는 봤어도 그 질문에 아무렇지 않게 답하기 어려운 아이의 마음은 그려진 적이 없다. 저도 그런 아이 중 하나였다”면서 “미화되지 않은 날것의 ‘작은 인간’을 그리는 데서 영화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감추고픈 성장통 "저 아이가 나" 관객 고백 잇따라


주인공 명은(문승아)은 초등학교 5학년에 올라가 처음으로 반장을 맡고, 글짓기 대회에 나간다. 그럴수록 시장에서 젓갈을 파는 부모가 부끄러워진다. 그렇게 시작된 명은의 거짓말은 학교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커질수록 불어난다. 어느 날 전학 온 자매가 불우한 가정 형편을 솔직하게 글로 써 글짓기상을 휩쓸자, 초조해진 명은은 여태껏 한 번도 남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를 써보기로 한다.

이 영화는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6), 김보라 감독의 ‘벌새’(2018) 등 사춘기 소녀의 성장통을 깊이 있게 그려 주목받은 신인 데뷔작 계보를 잇는다. 그 시절 내면 풍경을 섬세하게 묘사해 관객 스스로 유년기를 돌아보게 한다. 글쓰기를 통해 삶의 진실을 마주한다는 점에선 고(故) 윤정희 배우가 주연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2010)도 떠오른다. ‘시’의 어린이판 같다고 하자, 이 감독은 “‘시’와는 나이와 상황이 다르지만, 인간을 탐구한 깊이는 밀리지 않는다”며 “‘아이’를 떼고 여성으로,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으로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30대 초짜 부모…미성숙한 어른들 생생


명은은 자존심과 정직, 인정 욕구와 가족이 받을 상처를 저울질하며 한뼘 씩 자란다. 사랑받고 싶어하는 명은의 욕구가 너무 과하다 싶은 순간에도 이 감독이 새겨넣은 삶의 순간들이 관객을 설득시킨다. 30대 초반의 부모는 명은과 오빠를 억척스럽게 키워낸다. 독립영화에서 주류 사회와 거리가 먼, 파격적 역할을 도맡아 온 배우 임선우(담임교사 역), 장선(엄마 역), 강길우(아빠 역) 등이 미완의 어른들을 생생하게 연기했다.
데뷔작 '비밀의 언덕'으로 지난해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경쟁부문에 초청된 이지은 감독을 개봉(12일) 전날 서울 아트나인 영화관에서 만났다. 사진 엣나인필름
특히 엄마 역할의 장선이 돋보인다. 단골 손님이 손에 묻은 젓갈 양념을 엄마 옷에 닦곤 시치미 뗄 때, 명은이 받아온 상장에 고추장을 묻혔을 때 어린 딸과 눈이 마주친 엄마는 그저 무안한 눈빛을 감춘다. 그럴 때 속으로 삭인 무수한 말들을 장선은 섬세한 표정 연기로 전한다.
아역 문승아는 영화 ‘소리도 없이’(2020)에서 유괴 당하고도 야무지게 살아남는 역할로 눈도장을 찍은 배우다. 오디션을 통해 발탁된 이번 영화에선 뭐든 열심히 하고 또래보다 예민한 명은의 엉뚱함, 밉살스러운 구석까지 입체적으로 살려냈다. 원래 초등 4학년이던 설정을 문승아의 나이에 맞춰 5학년으로 바꿨다.

'소리도 없이' 이어 주연…괴물 아역 탄생


이 감독은 “초등학교 예술 강사 일을 하면서 나잇대마다 아이들이 다르단 걸 알게 됐다”면서 “1~3학년은 리액션이 좋고 환상을 믿지만, 5~6학년은 뭘 하자고 하면 심드렁하다. 4학년은 반반 섞여 있다. 감수성이 풍부하지만 현실감 있는 캐릭터를 위해 4학년으로 설정했는데 곧 6학년이 될 승아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바꿨다”고 했다.
문승아에 대해 “구수한 미소와 꾸밈없는 자기 목소리를 가진 배우다. 2시간 동안 힘 뺀 연기로 시선을 압도한다”고 평가했다. 학기 중 출연한 아역 배우들을 배려하기 위해 카메라 두 대를 동시에 돌려 같은 장면을 반복하지 않도록, 촬영 시간을 최소화했다고 이 감독은 말했다.
'비밀의 언덕'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엄마 역은 배우 장선이 연기했다. 사진 엣나인필름
영화에 글짓기를 활용한 이유는 “가족, 학교에만 머물러 있던 명은을 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하고 싶어서”였다.
그는 “명은의 세계가 팽창할수록 ‘우리 부모님은 왜 이러지’ 라는 심적 갈등이 커진다.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명은은 자신과 끊임없이 비교한다”면서 “그렇게 가장 멀리 나아갔을 때 다시 가족으로 돌아와 자기 자신 깊숙이 들어가 보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감독 자신도 글짓기 대회만 있으면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관련 기관을 찾아가 조사해서 글을 쓰던 학생이었다고 한다.

고물로봇과 마지막 생 정리하는 노인도 상상


지난 5일(수)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영화 '비밀의 언덕' 언론 시사와 기자 간담회에는 ‘명은’ 역에 문승아, ‘명은’의 담임 선생님 ‘애란’ 역에 임선우, 엄마 ‘경희’ 역에 장선, 아빠 ‘성호’ 역에 강길우 배우가 참석했다. 사진 엣나인필름
처음엔 무대 연출을 꿈꾸며 중앙대 연극학과에 진학했지만, 어느 날 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보고 영화로 진로를 틀었다. “새벽에도 보고 싶은 영화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면서 “영화를 이루는 모든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긴장감과 서스펜스가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었다”고 그는 돌이켰다.
2019년 만든 단편 ‘정리’에선 고물 로봇과 생의 흔적들을 ‘분리 수거’하는 여성 노인의 독특한 마지막을 그려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 사소한 일상에서 사회적 문제의식을 찾아내는 게 그의 작업 방식이다.
“제가 만든 이야기가 보편성을 얻기 위해선 치열하게 검증해야죠. 꿈꾸고 보고 싶었던 상상이 우리의 현실과 결합하는, 그런 영화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