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차례 일본시찰 후쿠자와 등 만나
[김삼웅 기자]
▲ 일본 개화기의 계몽사상가, 교육가, 저술가인 후쿠자와 유키치. |
ⓒ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소장자료 |
김옥균은 일본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했다. 몇 사람의 보고서를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되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 욱일승천의 기세로 변하고 있는 이웃나라의 실상을 좀 더 세밀히 알아야 했다.
"종래의 의례적인 종속관계를 실질적 식민지배 관계로 바꾸기 위해 외교와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 (주석 2) 하는 청국을 견제하는 데도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김옥균은 고종의 허락을 받고 1882년 2월 서광범 등과 함께 인천을 출발했다.
나가사키에 도착한 뒤 청국 영사와 만나 곧 친교를 맺게 되었다. <니시우미신문> 보도에 따르면 김옥균은 나가사키시에 소장되어 있는 북송시대 명장 악비(岳飛)의 유묵(遺墨) 진품을 감상하면서 진위를 판명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소와 제련소 등을 둘러보며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어 오사카에서 군수공장과 조폐국 등을 둘러본 뒤 교토와 고베 등을 차례로 시찰했다. 이후 도쿄에 도착한 뒤 개화당의 후원자 역할을 해준 후쿠자와 유기치 집에서 4개월 정도 머물며 홍아회(興亞會)에 참석해 일본의 조야 인사와 두루 만났다. (주석 3)
개화승 이동인의 추천으로 만나게 된 후쿠자와는 조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조선관'은 한마디로 "조선은 작고 약하고 미개한 나라"였다. 그는 자신이 발행하는 신문 <시사일보>에 조선 관련 많은 글을 썼다. 조선멸시론이 중심을 이룬다. 그 중의 한 대목이다.
▲ 일 만 엔 일본 최고가 지폐 일 만 엔에 새겨진 후쿠자와 유키치의 초상화. |
ⓒ 한성희 |
김옥균은 후쿠자와를 만난 자리에서 청국의 간섭과 만행을 언급하면서 분개한 심정을 금치 못했다.(<윤치호 일기> 1883년 1월 2일자) 또 그의 왜곡된 조선관의 시정을 촉구했다.
후쿠자와는 김옥균의 탁월한 품격에 경탄했다.
김옥균 일행은 계속 정계요인과 저명인사들을 접촉하면서 공공기관을 비롯하여 신문사·학교·병원 등의 시설을 시찰했다. 또 동경 부근에 있는 산업시설과 횡빈(橫濱)의 근대식 항구시설도시찰하였는데 이와 같은 시찰에는 대개 유길준과 정상각오랑(井上角五郞)이 동행했다.
뿐만 아니라 일본·중국의 학자, 정치가, 사상가들의 친목단체인 흥아회(興亞會)의 초청이 있었을 때 김옥균·서광범·김위·유길준 등은 함께 참석하여 시문도 짓고 담소도 하였다. 유길준은 당시 경응의숙에 유학 중인 27세의 청년이나 상당한 구식교육의 지식을 체득하고 있었으므로 학자 또는 정객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주석 5)
김옥균이 귀국 도중 일본 시모네스키에서 고국의 임오군병 소식을 전해들었다. 8월 7일 인천을 통해 귀국하였다. 6개월 여의 1차 방일에서 보고 느낀 바가 많았다.
김옥균이 일본 시찰을 통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는 현대적 교육을 받지 못하였지만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한국도 강력한 현대적 국가가 되는 것을 절실히 바랐다. 그리고 신지식을 수입하고 신기술을 채용하여 정부 및 일반 사회의 케케묵은 인습을 일변시킬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는 구미의 운명이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열국간의 경쟁 노력에 의한 점진적인 결과로서 수세기를 요하였지만, 일본은 1대에 그것을 속성하였던 것으로 이해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자연히 일본을 모델"(민태원, <갑신정변과 김옥균> 중 서재필 수기)로 하여 조선의 부르주아 개혁을 '속성'할 것을 생각하였다. (주석 6)
김옥균은 이 해 9월 7일 다시 일본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였다. 이듬해 4월에 귀국했다가 7월에 고종의 신임장을 소지하고 세 번째 일본을 시찰했다. 그는 당시 이조참의, 호조참판을 거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협판 등의 관직을 맡고 있었다.
이때 그의 목적에는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교섭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울릉도나 제주도의 어채권(魚採權)을 담보로 차관을 들여오는 것이었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세 차례에 걸쳐 일본을 방문하면서 각지를 돌아보고 조야의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메이지유신의 짧은 기간에 근대화되고 있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한편 공포감이 들었다. 그가 만난 인사 중에는 후쿠자와를 비롯 여럿이 기회가 되면 조선을 정벌하려는 야심에 차 있음을 읽고 가슴이 부글거렸다. 시급한 개화의 중요성을 절감하였다.
일본에 건너간 김옥균은 그들이 요구한 국왕의 신임장을 제시했는데 차관교섭에 아주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외상 이노우에나 서울을 떠날 때 만난 다케조에의 태도가 다같이 석연치 않았다. 이것은 청국과의 전쟁준비를 서둘고 있던 일본이 한국에 차관을 줄 생각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게다가 국내 수구파가 일본에 김옥균을 모함한 것도 작용했다.
김옥균은 일본의 태도가 표변한 것을 이내 눈치 채고 차관교섭을 단념하고 실의 속에 귀국했다. 김옥균이 일본에 배신당한 첫 번째 경험이었다. (주석 7)
국내의 개화파에 대한 도전은 거세가 나타났다. 흥선대원군 탄핵 상소를 비롯 의병을 일으키는 등 한말 정계의 여론을 주도했던 위정척사파의 거두 최익현의 상소에서 저간의 사정이 잘 드러난다.
개화는 국가의 복망(覆亡)을 재촉한다. 자주를 내세우고 있지만 나라를 일본에 넘기고 모든 정책과 명령을 그들에게 우선 보고한다. 군부(君父)를 마치 외국의 망명객으로 대하면서 겉으로는 대군주 폐하라고 존호를 높힌다.
전통적인 문물제도를 파괴하고 이적(夷狄)을 추종하면서 그것이 문명이라고 강변한다. 부국 강병을 외치면서 오히려 군사조직을 해체하고 방어체제를 철폐하며 국력을 날로 약화시킨다. 개화 제반 조치도 모두 이같은 어린이의 유희에 지나지 않고 장기적으로 원대한 규모를 갖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주석 8)
주석
2> 신동준, 앞의 책, 24쪽.
3> 앞과 같음.
4> 한상일, <일본지식인과 한국>, 59쪽 재인용, 오름, 2000.
5> 유동준 지음, <유길준전>, 84쪽, 일조각, 2005.
6> 강제언, <신편 한국근대사 연구>, 84쪽, 한울, 1983.
7> 송건호, <개화의 풍운아 김옥균>, <송건호전집(12)>, 122쪽, 한길사, 2002.
8> 최익현, <면암집> 권9, 서(書), 답정이방(答鄭李方) 을미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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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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