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찌 가방 멘 빨강머리, 147년 전통 허무는 상징될까

큼지막한 갈색 구찌 가방을 멘 신네르. AP=연합뉴스

"그의 더플백은 윔블던의 전통을 허무는 신호탄일까."

CNN은 12일 남자 테니스의 '신성' 야니크 신네르(22·세계랭킹 8위·이탈리아)를 2023 윔블던 '이주의 스타일' 수상자에 선정하며 이렇게 설명했다. 테니스 4대 메이저 대회 중에서도 가장 유서 깊은 윔블던에는 유명한 전통이 있다. 선수들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 옷만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대회부터 여성 선수들에게 바지 혹은 치마보다 길지 않다는 조건으로 흰색이 아닌 어두운색 속바지를 허용하기로 했다. 속바지를 제외한 모자, 머리띠, 양말, 팔목밴드 등은 물론 라켓 손잡이까지 여전히 흰색으로 통일해야 한다. "변화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147년간 '순백의 전통'을 이어왔다.

그런데 올해 신네르가 윔블던을 뒤흔들었다. 단식 1라운드 경기에서 명품 브랜드 구찌의 큼지막한 갈색 더플백을 메고 코트에 나타났다. 가방엔 자신의 이름 이니셜 'JS'를 새겼다. 그는 타고난 빨강머리 덕에 평소에도 많은 시선을 받는데, 이날 하얀 옷에 커다란 명품 가방을 든 모습은 파격 그 자체였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신네르는 테니스 역사상 명품 가방을 들고 경기에 나선 첫 선수다.

구찌 더플백을 메고 코트에 입장하는 신네르. 사진 야니크 신네르 인스타그램

뉴욕타임스는 "붉은 머리의 화려한 이탈리아인 신예"라고 신네르를 소개한 뒤 "그가 든 (구찌)더플백은 비행기 1등석의수하물칸에서나 볼법한 가방"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패션에 관심이 많은 테니스 '황제' 로저 페더러나 '여제' 세리나 윌리엄스(이상 은퇴)도 현역 시절 한 번도 명품 브랜드 더플백을 코트에서 든 적 없다"고 했다. 이번 대회 우승 후보 노박 조코비치(세계 2위)도 흰색 스포츠 브랜드 더플백을 사용 중이다.

CNN에 따르면 구찌와 시네르 팀은 국제테니스연맹과 윔블던 주최 측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구찌 가방을 들 수 있도록 사전에 허가받는 치밀함을 보였다. 시네르는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8강전까지 구찌 가방을 멨다. 반면 관중은 당당하게 개성을 드러낸 당돌한 신예에게 박수를 보냈다. CNN은 "이번 대회 가장 화제가 된 인물이 신네르"라며 그를 오랜 전통을 깨고 앞으로 나아갈 변화의 상징으로 봤다. 신네르는 "나는 새로운 방향을 향해 첫발을디뎠다. (내 패션은) 수많은 스토리를 낳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세계랭킹 8위의 강호지만, 아직 메이저 우승이 없는 신네르. 사진 야니크 신네르 인스타그램

이런 신네르를 달갑지 않게 보는 시선도 있다. 윔블던 홍보 포스터에 그가 신예 자격으로 페더러, 조코비치, 세리나 등 레전드들과 함께 소개되자, 36세 베테랑 앤디 머리(영국)는 "(메이저 우승이 없는) 시네르는 자격이 없다"고 지적했다. 머리는 윔블던 2회 우승자인데, 그조차도 포스터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신네르는 패션 감각 만큼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실력을 알릴 기회도 잡았다. 그는 14일 열리는 대회 남자 단식 준결승에서 5연패에 도전하는 조코비치와 맞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