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세트테이프가 다시 돌아왔다
[전윤정 기자]
▲ 카세트 테이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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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막을 내린 제27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의 폐막작은 영화 <모두의 노래>였다. 호러 영화 <주온> 시리즈로 잘 알려진 감독 시미즈 다카시의 신작이다. 시작은 한 방송국 스태프가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카세트테이프다. 그 테이프를 들었던 라디오 쇼 진행자가 실종되면서 본격적인 사건으로 들어간다. 영화의 중요한 매개체가 카세트테이프인 만큼 영화 사운드에 공을 들였다는 감독 인터뷰를 보니, 카세트테이프를 통해 음악을 듣던 시절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클래식 명곡 100선> 카세트테이프 전집이 집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해적판이 아니었을까 싶다. 007가방처럼 생긴 플라스틱 상자 안에는 똑같이 생긴 카세트테이프가 빼곡히 들어있었고, 테이프 겉면에는 곡 제목이 희미하게 적혀있었다. 나는 카세트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하나씩 넣었다 뺐다 하면서 자연스럽게 클래식 음악을 많이 듣게 됐다. '클래식 음악은 어렵다'라는 편견 없이 클래식을 음악을 받아들였다.
중학교에 올라가 라디오를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하면서 관심사는 팝송으로 옮겨갔다. 지금은 팝송 프로그램이 없는 방송사도 많다고 하는데, 1980년대 초중반만 해도 라디오에서는 주로 팝송을 틀어줬다. 겉멋으로 AFKN 라디오 듣기도 했는데, 친구들과 "아메리칸 탑 포티(50)~" 로고송을 부르며 순위를 외우기도 했다. 듀란듀란, 왬, 엘튼 존 등 영국 팝과 마이클 잭슨, 컬쳐 클럽, 신디 로퍼, 마돈나 등 미국 팝을 가사도 모른 채 열심히 들었다.
이렇게 많은 음악을 평소에도 들을 방법이 바로 '카세트테이프' 녹음이었다. 라디오 DJ가 내가 좋아하는 노래 소개를 하면 바로 카세트 녹음 버튼을 눌렀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을 빈 테이프를 녹음해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다. 상반기 특집이나 연말 특집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 100곡' 방송은 그야말로 노다지였다. 내가 좋아하는 곡은 몇 위일지, 1위는 어떤 곡일지 긴장감을 느끼기도 했다. 뭐, 언제나 1위는 비틀스의 'YESTERDAY'였지만.
부모님을 졸라서 '더블 데크 카세트'를 샀다. 카세트 데크가 두 개라 더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실수로 녹음된 DJ의 멘트를 잘라내기도 하고, 음악 순서를 내 마음대로 다시 배치할 수 있었다. 발라드와 댄스곡을 구분해 '슬플 때 듣는 음악', '신날 때 듣는 음악'이라 붙이기도 하고, 팝송이나 가요 중 듀엣곡만 모으기도 했다. 그렇게 내가 만든 테이프를 친구들과 선물로 주고받았다. 한번은 친구에게 프랑스 샹송만 녹음된 테이프를 선물 받았다. 가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프랑스어 특유의 유려한 발음과 선율이 좋아서 열심히 들었다. 사춘기 시절 우리는 직접 만든 수제 카세트테이프를 나누면서, 서로의 음악 취향에 영향을 받았다.
고등학교 때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마이마이)가 생겼다. 부모님은 한샘 국어 등 공부 테이프를 들으라고 사주셨지만, 음악을 더 많이 들었다. 전혀 자율적이지 않았던 야자(야간자율학습)시간을 견디기 위해서 나는 플레이어를 옷 속에 숨기고 이어폰을 소매로 빼내어 귀에 꽂고 머리카락을 내리고 음악을 들었다. 이문세, 변진섭, 이상우 등 당시 유행하던 1980년대 후반 발라드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사서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들었다. 테이프가 밖으로 늘어지면 연필로 팽팽하게 감았다. 이선희, 이문세 등 당시 인기가수들이 출연해 노래와 토크, 콩트도 하는 <이종환 밤의 디스크 쇼> 공개방송도 인기여서, 녹음본을 여러 번 돌려 들으며 혼자 키득거리던 기억이 난다.
1990년대에 들어가 CD(컴팩트 디스크)가 대세가 되면서 카세트테이프는 내 삶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깨끗한 음질과 견고성을 자랑하던 CD도 이제 음원과 스트리밍에 자리를 내줬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하지만 요즘 카세트테이프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카세트 플레이어가 자주 등장하며 젊은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마블 시리즈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에서 우주에 사는 주인공 스타로드는 카세트 플레이어로 음악을 즐겨 듣는다. 미국 드라마 <기묘한 이야기>나 대만 드라마 <상견니>, 우리나라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등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카세트 플레이어, 카세트테이프는 중요한 역할로 등장한다. 이를 반영하듯 레이디 가가, 두아 리파 등 해외 가수는 물론이고 우리나라 가수 블랙핑크, BTS도 카세트테이프로 새 앨범을 발매했다. 따라서 카세트 플레이어의 중고 거래가 활발하고, 카세트 데크가 들어간 블루투스 스피커 등 신제품도 나오고 있다.
올해 말, 비틀스의 신곡이 나온다고 해서 벌써 화제다. 이 역시 한 개의 남겨진 카세트테이프 덕분이다. 지난달, 13일 영국 BBC 라디오에 출연한 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81)는 존 레넌이 1978년 작곡한 '나우 앤드 덴'이 녹음된 카세트테이프를 그의 부인 오노 요코에게 받았다고 밝혔다. AI를 통해 존 레넌이 남긴 목소리와 연주를 선명하게 추출해 노래로 완성했다고 한다. 우리는 '폴을 위해'라고 적혀있던 카세트테이프 덕분에 비틀스의 마지막 작품이 될 새 노래를 듣게 됐다. 카세트테이프는 아직 우리에게 유효한 음악 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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