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전 재산 투자한 배우, 예상 밖 결과
[양형석 기자]
유재석, 강호동과 함께 지상파 3사 연예대상을 모두 차지한 '예능대부' 이경규는 어린 시절부터 '코미디 외길인생'을 걸었을 것 같은 유쾌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경규는 학창 시절부터 온갖 액션영화를 섭렵하던 '이소룡 키즈'였고 영화인을 꿈꾸며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이경규가 2년 후배 최민식과 함께 연기와 예술에 대해 토론하고 고뇌하며 대학시절을 보내다 개그맨으로 변신했다는 것은 제법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주병진의 보조MC로 시청자들을 웃기던 이경규는 <몰래 카메라>로 전성기를 달리던 1992년 학창시절의 꿈을 담아 만든 액션영화 <복수혈전>을 선보였다. 개그맨 출신이라는 이유로 충무로에서 외면을 받은 이경규는 직접 감독과 제작, 각본, 주연을 맡았고 사비로 제작비를 충당해 영화를 완성했다. 하지만 <복수혈전>의 공식 흥행성적은 서울관객 2만 명에 불과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 <클레멘타인>은 1억8500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트로이>와 같은 날 개봉해 흥행 참패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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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탄생하는 B급 영화
블록버스터와 반대되는 개념의 영화를 의미하는 'B급 영화'는 제작비가 적게 들어간 저예산 영화나 독립영화를 의미하기도 하고 제작비와 무관하게 특정한 표현과 정서를 가진 '서브컬처 영화'를 뜻하기도 한다. 물론 감독과 배우가 의도적으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기 위해 일반상업영화와는 다른 정서의 영화를 만들 때도 있고 조악한 완성도 때문에 본의 아니게 'B급 영화'로 치부되는 경우도 있다.
미국의 배우 겸 감독 벤 스틸러는 할리우드에서 B급 코미디의 정서를 대중들에게 가장 잘 전달하는 영화인이다. 특히 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 제작을 맡은 <쥬랜더>는 그의 'B급 감성'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영화다. 벤 스틸러는 <피구의 제왕> <트로픽 썬더> 같은 B급 코미디 전문으로 유명하지만 세 편 합쳐 13억 5000만 달러의 흥행성적을 올린 <박물관이 살아있다> 같은 평범한(?) 코미디 영화에도 출연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홍콩에는 1990년대 홍콩 코미디의 제왕으로 군림했던 '희극지왕' 주성치가 있다. 벤 스틸러와 마찬가지로 배우와 감독을 겸하고 있는 주성치는 평범한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난해한 B급 코미디로 홍콩은 물론이고 아시아 전역에서 많은 마니아들을 거느렸다. 물론 주성치 영화들이 B급 감성으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1년에 최소 네다섯 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하며 속성으로 영화를 찍어야 했던 홍콩영화계의 슬픈 현실도 담겨 있다.
2000년 단편영화들을 묶은 독립영화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통해 충무로에 혜성처럼 등장한 '액션키드' 류승완 감독은 이듬해 임원희 주연의 온라인 단편영화 <다찌마와 리>를 선보였다. 의도적으로 과장된 연기와 흑백영화 시절을 연상케 하는 연출, 그리고 후시녹음을 통해 관객들에게 독특한 재미를 선사한 B급 코미디 <다찌마와 리>는 7년이 지난 2008년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는 제목의 장편영화로 재탄생했다.
영구아트무비 소속으로 1999년에 개봉했던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 각본작업에 참여했던 박희준 감독은 2001년 홍콩스타 여명과 떠오르던 신예 이나영을 캐스팅해 장편 데뷔작 <천사몽>을 연출했다. 하지만 <천사몽>은 조악한 완성도로 엄청난 비판을 받으면서 서울관객 1만 2000명에 그쳤다. 벤 스틸러와 주성치,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이 '의도적인 B급 영화'였다면 <천사몽>은 낮은 완성도 때문에 'B급'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영화였다.
▲ 스티븐 시걸은 2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출연분량에도 100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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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준은 배우 데뷔 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태권도 국가대표 선수 출신이다(이동준이 현역으로 활약했던 1980년대 태권도는 전자호구도 없었고 헤드 기어조차 쓰지 않은 채 경기를 했다). 선수 은퇴 후 1988년 배우로 전향한 이동준은 1990년 드라마 <야망의 세월>에 출연하며 주목 받기 시작했는데 당시 같은 드라마에 출연했던 또 한 명의 신예배우가 바로 '꾸숑' 역의 최민식이었다.
1990년대까지 드라마와 영화를 넘나들며 활동하던 이동준은 2000년대 초 자신의 인생을 건 영화를 만들었다. 이동준이 주연은 물론이고 제작과 기획에도 참여한 액션영화 <클레멘타인>이었다. 이동준은 사비 50억 원을 투자해 인생 최대의 역작 <클레멘타인>을 만들었지만 전국관객 6만 7000명으로 흥행 참패했다. 이동준은 <클레멘타인> 이후 지방 유흥업소에 출연하며 한동안 생계를 위해 힘든 생활을 해야 했다.
사실 <클레멘타인>은 애초에 좋은 흥행성적을 올리기 힘든 환경에 있었다. 당시 한국영화는 2003년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그리고 천만 영화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차례로 개봉하며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그만큼 관객들의 눈높이도 높아지던 시기였다는 뜻이다. 심지어 <클레멘타인>이 개봉한 2004년 5월 21일에는 브래드 피트와 올랜도 블룸, 에릭 바나 주연의 전쟁액션영화 <트로이>가 함께 개봉했다.
그래도 <클레멘타인>이 최소한의 볼거리와 완성도를 갖췄다면 처참한 결과는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클레멘타인>에서는 전라도 사투리를 쓰던 주인공 승현(이동준 분)이 중반부터 표준어를 쓰고 불법도박장의 기물을 파손했다는 사소한 이유로 경찰직을 잃는다. 또한 아빠의 생일상을 차리기 위해 저금통을 깨던 8살의 사랑이(은서우 분)는 얼마 후 고가의 커플반지를 구입하는 등 <클레멘타인>에는 개연성을 무시한 장면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클레멘타인>을 연출한 김두영 감독은 1994년 <지역구>와 1996년 <카리스마> 등 데뷔 초기 조폭 영화들을 주로 만들었다(이동준과는 <카리스마>를 통해 인연을 맺었다). 2003년에는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괴작'으로 꼽히는 <주글래 살래>를 연출했고 곧바로 <클레멘타인>을 만들며 감독으로 커리어를 이어갔다. 김두영 감독은 지난 2014년 <독도512>라는 영화를 연출한다는 발표가 있었지만 9년이 지난 현재까지 제작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 주인공 승현의 딸 사랑을 연기했던 아역배우 은서우는 같은 해 <분신사바>의 우정출연을 끝으로 배우 커리어가 멈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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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타인>이 개봉했을 때 관객들이 가장 관심을 가졌던 배우는 주인공 이동준이 아닌 할리우드 배우 스티븐 시걸이었다. <언더 시즈> 시리즈로 유명한 액션배우이자 실제로 여러 무술을 연마한 무도인이기도 한 시걸은 <클레멘타인>에서 영화의 '최종보스' 잭 밀러를 연기했다. 영화 속에서 승패는 정확히 보여주지 않지만 악역처럼 등장했던 밀러는 경기가 끝난 후 승현을 찾아가 챔피언 벨트를 전달하는 무사도를 보여줬다.
재미 있는 사실은 <클레멘타인>에서 잭 밀러를 연기했던 배우가 스티븐 시걸 한 명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화 초반 승현과 태권도 경기를 가졌던 잭 밀러는 동양인 액션배우였고 판정 결과가 나올 때는 시걸이 아닌 또 다른 서양배우가 잭 밀러를 연기했다. 반면에 시걸은 현재 시점에서 승현과 마지막 대결을 할 때만 등장한다. 다시 말해 잭 밀러 역은 무려 세 명의 배우가 하나의 캐릭터를 연기했다는 뜻이다.
2002년 하지원 주연의 <폰>에 출연했던 아역배우 은서우는 <클레멘타인>에서 주인공 승현의 딸 사랑 역을 맡았다. 하지만 <폰>에서 나쁘지 않은 연기를 보여줬던 은서우는 <클레멘타인>에서 어린 나이에 분노조절장애가 찾아온 연기를 선보이며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클레멘타인>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히는 1분 넘게 이어지는 사랑이의 마지막 절규는 어린 아역배우의 건강이 걱정될 정도로 처절했다.
TV와 영화, 연극을 넘나들며 좋은 연기를 보여주던 배우 기주봉은 '빌런' 황종철 역으로 출연했다. 황종철은 평소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대사를 많이 하는 캐릭터인데 검사에게 체포되거나 맞으면서도 여유롭게 성경을 읊는 장면은 기주봉이라는 배우의 평소 이미지와는 상당히 이질적이다. <클레멘타인> 개봉 당시 <개그콘서트-봉숭아학당>에서 '세바스찬'으로 유명세를 탔던 개그맨 임혁필은 황종철의 부하로 출연해 '개그 캐릭터'로서 역할에 충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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