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 제조기' 조지 마이클의 대성공... 친구 앤드류의 숨은 조력

김상화 2023. 7. 13. 10:42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리뷰] 넷플릭스 다큐로 만나보는 1980년대 팝스타 '왬!'의 흥망성쇠

[김상화 기자]

 넷플릭스 '왬!' 예고편
ⓒ 넷플릭스
 
지난 7월 1일(현지시간)은 1980년대를 풍미했던 어느 팝 듀엣의 첫 번째 정규 음반< Fantastic! >이 발표된 지 4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왬!(Wham!)이다. 'Wake Me Up Before You Go-Go!'를 비롯해서 'Careless Whisper', 'Last Christmas' 등의 빅히트곡을 남긴 1963년생 동갑내기 영국 청년 조지 마이클(2016년 별세)+앤드류 리즐리는 1986년 6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고별 공연을 끝으로 짧은 역사를 마감했고 핵심 멤버 조지는 이듬해 첫 솔로 음반 < Faith >을 시작으로 팝 음악계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그룹 명을 그대로 사용한 넷플릭스 신작 다큐멘터리 <왬!>은 중학교 친구로 만나 아마추어 밴드를 결성하고 후일 세계를 지배하는 팝스타로 성장했던 왬!의 짧은 역사를 되돌아 본 작품이다. 단 3장의 음반을 내놓고 사라졌지만 이들이 남긴 곡들은 시대를 초월한 명곡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중요한 의문이 존재했다. 대부분의 곡을 조지 혼자 작사/작곡으로 만든 데다 보컬마저 조지의 몫이었다. 그렇다보니 과연 듀오로서 왬!의 가치가 존재하느냐라는 점이었다.  

팀이 해산한 후 조지가 여전히 스타로서의 인기를 누렸지만 앤드류는 음반 하나 내놓고 음악계를 떠난 탓에 사람들은 그저 '왬!=조지'와 동일시하는 시선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번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는 왬!의 결성 이전부터 해산 직후까지의 다양한 영상을 담아 이 팀이 결코 한 사람만의 소유물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런던 댄스 클럽의 지배자
 
 넷플릭스 '왬!' 예고편
ⓒ 넷플릭스
 
앤드류가 재학중이던 학교에 발음하기 힘든 이름을 지닌 그리스계 학생이 전학을 오게 되었다. 담임 선생님은 '게오르기오스 키리아코스 파나요트'(조지 마이클)를 도와줄 학생을 찾았고 앤드류가 기꺼이 그 일을 맡기로 했다. 그때부터 우정을 쌓았던 두 사람은 '이그제큐티브'라는 아마추어 록밴드를 잠시 결성했다가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왬!을 만들고 꾸준히 데모 테이프를 만들면서 음반사의 문을 두드렸다.

늘 클럽에서 여가를 보냈던 이들에게 댄스 음악은 가장 친숙한 소재였고 당시 조금씩 유행을 타고 있던 랩을 접목시킨 'Wham! Rap!(Enjoy What To Do)'을 1982년 첫 싱글로 내놓았다. 대성공을 예감했던 그들이었지만 순위에도 오르지 못하는 흥행참패를 경험했고 후속 싱글 'Young Guns'는 UK 차트 42위까지 오르긴 했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그냥 흐지부지 사라질 뻔했던 왬!을 구원한 건 당시 영국의 인기 음악 TV프로그램 <탑 오브 더 팝스> 출연이었다. 당시 예정된 가수가 나올 수 없게 되면서 대타로 등장한 이들은 조금씩 인지도를 얻게 되었고 'Young Guns', 'Wham! Rap!'은 뒤늦게 Top 10에 오르는 반응을 얻었다. 소속사와의 계약 분쟁을 야기했지만 순회 공연을 거치면서 영국 팝음악계의 신예 스타로 주목을 받았다. 이제 그들에겐 미국 진출이라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연이은 히트곡 배출... 전성기에 작별 고한 듀엣
 
 넷플릭스 '왬!' 예고편
ⓒ 넷플릭스
 
정규 2집 < Make It Big >은 왬!을 일약 월드스타로 만든 대인기작이었다. 무려 3곡의 빌보드 1위곡을 배출하면서 전 세계에서 1000만 장을 팔아치울 만큼 성공을 거뒀다. 작곡 뿐만 아니라 프로듀싱에 대한 전권을 부여 받았던 조지 마이클은 단순히 섹시 스타가 아니라 제대로 음악을 만드는 창작자로서 본인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했다. 

여기엔 친구 앤드류의 양보, 현실적인 인식이 한몫을 차지했다. 원래 각자 곡을 만들어 나눠 싣는 방식을 추구하면서 왬!을 만들었지만 앤드류는 데뷔 이전 공동으로 만들었던 'Careless Whisper'를 제외하면 본인의 능력이 조지만큼은 아니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팀의 성공을 위해선 조지의 곡 중심으로 가야 한다는 걸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낙천적인 성격이었던 탓에 양보를 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기에 큰 마찰 없이 팀은 굴러갈 있었다. 하지만 성공이 커지면서 왬!의 생명은 딱 여기까지였다. 앤드류의 회고에 따르면 조지는 인정을 받고 싶어했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고 그는 정의했다. 

당시 한 시상식에서 조지를 만난 팝스타 엘튼 존은 그를 두고 "배리 깁(비지스), 폴 매카트니(비틀스)에 견줄 만한 인물이다. 조지에겐 나, 데이비드 보위가 21~22살 때 가졌다면 좋았을 재능이 있다"고 작곡가로서의 역량에 대해 극찬했다. 결국 조지 마이클은 팀 활동을 끝내고 자신만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든든한 조력자 앤드류가 있었기에...
 
 넷플릭스 '왬!' 예고편
ⓒ 넷플릭스
 
한창 왬!이 인기를 누리던 시절 각종 토크쇼 출연 영상만 보더라도 진행자는 기타리스트 앤드류를 마치 조지 덕분에 빛을 본 인물로 간주하고 무례한 질문을 서슴없이 내뱉곤 했다. 하지만 왬!, 더 나아가 조지 마이클의 솔로 성공의 이면에는 앤드류 리즐리의 배려, 이해심이 존재했다.  

1983년 싱글 'Club Tropicana' 뮤직 비디오 촬영 도중 이뤄진 조지의 갑작스런 커밍아웃에도 결코 당황하지 않고 이를 조지의 아버지를 비롯한 외부 사람들에게 비밀로 붙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더 많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많은 부분을 양보했던 덕분에 짧은 활동 기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당시 음악계에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계약 분쟁을 끝낸 이들을 영입했던 메이저 레이블 컬럼비아 레코드의 관계자는 이렇게 증언한다. "사람들은 앤드류가 조지에게 무임승차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앤드류가 곧 왬!이었다. 조지는 어릴 때부터 앤드류를 따라했다. 결국 앤드류는 2명이었다. 진짜와 짝퉁…"

앤드류는 그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 많은 사람들이 (고별공연을) 보러 왔던 건 왬!이 자신들의 젊음을 대변했기 때문이었다"라고. "너 없이는 못했다"라는 조지의 고백과 더불어 둘이었기에 가능했던 짧았던 왬!의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덧붙이는 글 | 필자의 블로그 https://blog.naver.com/jazzkid 에도 수록되는 글 입니다.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