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읽지 않은 책에 대한 변명

2023. 7. 13.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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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있는 책 다 읽으셨어요?”

연구실에 처음으로 찾아온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다. 학생들이 가지는 합리적 의심을 누그러뜨리고자 예전에 들었던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원래 책은 읽으려고 사는 게 아니라 사놓은 책 중에 읽는 거예요.” 필자도 학창 시절 교수님들 연구실에 가면 벽면을 빽빽이 채운 책에 위압감을 느꼈고 저분은 언제 저 많은 책을 다 읽으셨을지 궁금했다. 그러다 유학 시절,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의 서가에서 안 읽은 책과 읽다 만 책을 왕창 발견하고는 책은 ‘읽는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해방되었다.

고대부터 인간이란 존재는 읽지도 않을 책을 사고 보관해 왔다. 솔직히 말해 책을 안 읽을 사람이 책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수많은 작가와 출판사의 생존이 위협당할지 모른다. 안 읽힐 책도 제작되고 유통될 수 있어야 사상의 자유와 다양성이 보장되는 건강한 세상이 될 수 있다. 이처럼 책을 소장하고도 안 읽는 기이한 호모 사피엔스의 본성은 머나먼 옛날 도서관을 등장하게 했다. 읽은 책뿐만 아니라 안 읽은 책, 대박 난 책만 아니라 폭삭 망한 책까지 공존하는 놀라운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수천년 동안 인류는 도서관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왔다. ‘나중에라도 이 책을 읽을 것이다’ 혹은 ‘나는 아니라도 누군가 이 책이 필요할 것이다’라는 희망에 도서관은 웬만한 제국 종교 문명보다 더 오랜 역사를 이어간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도서관이 ‘공적’ 시설로 인식되고 곳곳에 공공도서관이 생기면서 도서관의 가장 기본 형태였던 개인 서재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듯하다.

독일의 철학자이자 문예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책 수집이 독자와 맺는 관계에 대해 깊고도 독창적인 성찰을 남겼다. 한 사람이 남긴 여러 물건이 그에 대한 정보를 주겠지만 그가 소장한 책만큼 그가 누구인지를 잘 알려주는 것은 없다. 죽기 전까지는 사람이 책을 모으고 보관하지만 그 이후는 개인 도서관이 그의 취향 관심 습관 등을 보존하고 증언한다. 이처럼 한 사람과 그가 소유한 책의 관계는 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신비한 인격적 차원이 있다.

독서 이론을 빌려올 것까지도 없이 우리의 책 수집 경험을 되짚어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특정 분야에 관한 독서를 시작할 때 전문가의 추천을 받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고심하면서 책을 하나둘 구매한다. 그러다 안목이 길러지며 이전에 몰랐거나 관심 없던 책까지 눈에 들어오고 좋은 작품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책을 사게 된다. 책꽂이에 읽은 책과 안 읽은 책의 비율이 변화하면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껏 내가 책을 고르며 소장 목록을 채워갔다면 이제는 서가에 꽂힌 책들이 어떤 책을 더 사야 할지 영향을 끼치며 내 생각과 행동까지 빚어간다. 개인 도서관이 뿜어내는 저강도 압박에 오래 노출되면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서 찾기 힘든 독특한 개성과 인생관, 취향 등을 형성한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서 읽은 책뿐만 아니라 읽지 않은 책도 중요하다. 개인 서재에 읽지 못한 책은 내게 발전할 여백이 있다는 것과 내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할지를 일상의 공간에서 계속 상기시킨다.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책이 있다는 사실은 내 생각과 행동에 이전과는 다른 새로움이 열릴 가능성을 가리키는 징표이기도 하다.

물론 읽지 않으면서 책을 사고 보관하는 행동은 몹시 위험하다. 경제적 압박감에 시달릴 수 있으며, 가족과 주위의 핀잔을 무릅써야 하고, 집값 비싼 한국 사회에서 공간 확보를 위한 투쟁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니 ‘여기 있는 책 다 읽으셨어요’는 쉽게 던질 질문은 아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한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자기가 산 책마저 읽지 못한 사람이 순간 한심하게 보일지라도, 내 눈앞에 인류 문명을 수천년간 지탱하고 발전시켜 온 ‘안 읽은 책의 주인’이 있음에 경탄할 일이다.

김진혁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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