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도입 30년 만에 ‘누더기’가 된 수능
1993년 도입돼 올해로 30년을 맞은 수학능력시험(수능)이 최근 또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세상에 문제없는 제도는 없겠지만, 30년을 버텨온 데는 나름의 생명력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따듯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달라는 그동안의 요구에 맞추다 보니 사정을 잘 모르는 쪽에서는 길을 잃은 것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론을 살펴보면 수능에 문제가 많으니 개선하자는 주장보다 수능이 수명을 다했으니 축소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더 많다. ‘어게인 2017’ 진영과 ‘응답하라 1994’ 진영으로 갈린다. 전국 4년제 대학 총장의 52%가 “수능을 자격고사화하자”고 응답했다는 조사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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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수보다 대학 적성 측정 목적
사교육 커지자 잇단 땜질 처방
학생을 시험 볼모로 삼아서야
」
‘어게인 2017’은 학생부종합전형을 부활하자는 주장이다. ‘조국 일가 입시 비리’ 사태로 공정성에 치명타를 입은 학생부종합전형 지지자들이 2025년 고교학점제 도입을 계기로 ‘어게인 2017’을 시도하고 있다. 수능이 절대평가로 전환되는 목전까지 간 게 2017년이었다. 당시 김상곤 교육부 장관의 강력한 의지로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해 수능 비중을 축소하려다 문재인 정권 내부의 반대와 여론의 반발로 무산됐다.
수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는 ‘2018년 대입제도 개편 공론화위원회’에서 벌어졌다. 당시 여론은 수능의 손을 들어줬지만 이를 무시하는 움직임이 벌어졌다. 공론 조사에서 ‘수능 상대평가 유지’가 가장 높은 지지를 받았는데도 특정 세력이 밀었던 ‘수능 모든 과목 절대평가 전환’과의 의견 차이(3.6%포인트)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이 이유였다.
‘응답하라 1994’는 수능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야 수능이 원래 계획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따르면 수능이 과거의 학력고사처럼 회귀했고 교과서를 공부해야 풀 수 있는 저차원적 수준이 됐다고 여긴다.
원래 수능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적성(aptitude)을 측정하려던 시험이었지 고등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묻는 시험이 아니었다. 미국판 수능인 SAT가 바로 ‘학업적성시험 (Scholastic Aptitude Test)’이다. 고차적인 사고력을 측정하고 단편적인 교과목 지식의 암기를 지양했다. 이런 의도가 초기 수능에 반영됐고 당시 학계와 언론은 환영했다. 교과서를 달달 암기하는 대신 다양한 독서와 신문 읽기 등이 고득점으로 이어지는 바람직한 출제로 여겨졌다.
사회탐구에서는 사회·지리·세계사를 분절적인 과목으로 취급하지 않고 관련 지식을 통합해 묻는 통합교과형 문제, 요즘 말로는 ‘융합형 문제’가 나왔다. 과학탐구도 마찬가지였다. 한국 교육의 가장 큰 병폐로 지목된 암기식 교육을 개혁할 수 있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여겨졌지만, 예상보다 큰 문제가 생겼다.
첫째,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다. 적성시험을 보면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영향을 많이 준다. 가정에서 신문·잡지 구독 여부, 학력이 높은 부모가 사용하는 고급 어휘 등이 시험 성적을 높이게 된다.
둘째, 지능의 영향력이 커졌다. 교과서를 열심히 공부해 치르는 시험이 아니라 머리가 좋은 학생에게 유리해 초기 수능이 IQ 테스트 같다는 지적이 있었다. 셋째, 입학시험의 사교육 의존이 커졌다. 교육부는 수능이 도입되면 문제 유형이 바뀐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예고했지만 지리 선생님은 지리, 사회 선생님은 사회를 가르쳤다. 학교가 준비되지 않은 채 나온 문제는 결국 ‘손사탐’을 만들어냈다.
수능 이전의 사교육이 ‘대학생 과외’와 동의어로 여겨질 정도로 가내 수공업 수준이었다면 ‘통합교과적’ 수능 문제는 거대 사교육 기업의 탄생을 초래했다. 교과를 통합해서 ‘바람직했던’ 문제는 교사도 대학생도 준비하기 힘든 문제, 요즘 말로 ‘킬러 문제’였기 때문이다.
교육학적·평가학적 관점에서는 바람직할지 모르지만, 학교 현장과 사교육 확대 등을 고려하면 수능을 땜질하고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노력이 수능의 원래 의의를 지키는 것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처방이었다. ‘어게인 2017’와 ‘응답하라 1994’ 모두 철 지난 어른들의 넋두리다. 어른들의 이해관계로 학생들의 시험을 볼모 삼지 말자. 그게 공정의 시작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박대권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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