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호의 시선] 민주당이 ‘민주유공자법’ 통과시키려면
박민식 보훈부 장관이 사흘째 자가 격리 중이다. 최근 컨디션이 좋지 않아 검진을 받아보니 코로나 양성 판정이 나왔다고 한다. 보훈부 안팎에선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4일 국회 정무위 소위에서 단독 처리한 민주유공자법에 워낙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몸에 무리가 온 탓 아니냐”는 얘기가 돈다. 본명이 ‘민주 유공자 예우에 관한 법률’인 이 법안은 과거 민주화보상법에 따라 보상을 받았던 이들 중 사망자와 부상자 등 892명을 ‘민주 유공자’로 예우하자는 골자다.
민주화에 공을 세운 이를 국가가 예우해야 한다는 논리는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민주화 유공자를 가려내려면 객관적 평가와 국민적 합의가 전제돼야 한다. 한데 민주당은 대상자의 명단과 공적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망’ ‘부상’ 같은 기준만으로 묻지 마 입법을 밀어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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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 셀프 특혜 논란에도 단독처리
국민 동의 없는 ‘묻지마 법’ 지적
참전용사 예우법 같이 추진하길
」
주무 부처인 보훈부가 이 법의 적용 대상을 알아보려 했지만, 근거 자료는 민주화 보상 심의위원회가 만든 백서에 나온 보상자 명단뿐이었다고 한다. 명단에 나온 ‘정보’는 보상자의 이름과 “언제 어디서 무엇을 했다”는 두줄짜리 기록이 전부라고 한다. 답답해진 보훈부는 국가기록원에 문제의 892명의 인적 정보 공개를 요청했다. “주무 부처도 적용 대상을 모르는 법안을 어떻게 만들겠는가”는 호소도 곁들였다. 그러나 국가기록원은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명단을 줄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평소 강골로 소문난 박민식 장관이 코로나에 걸릴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보훈부에 따르면 이 법의 적용을 받는 민주화 운동 카테고리는 145개에 달한다고 한다. 그중에는 법원에서 반(反)국가단체 판결을 받은 남민전 사건, 경찰관 7명의 목숨을 앗아간 1989년 부산 동의대 사건, 민간인을 ‘프락치’로 몰아 감금·폭행한 의혹을 받는 서울대 민간인 고문 사건 등이 포함돼있는 것으로 보훈부는 파악하고 있다. 과연 이런 사건들에 연루된 사람들이 4·19나 5·18 유공자와 동등한 ‘민주화 유공자’로 예우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국민이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민주당은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민주유공자법을 추진했다가 ‘운동권 셀프 특혜법’이라는 비판이 거세지자 거둬들였다. 이번에는 이전 법안에 포함됐던 교육·취업 지원이 삭제됐지만, 의료 지원 등은 유지됐다. 그러나 일단 법이 제정되면 개정 작업을 통해 삭제한 특혜 조항을 얼마든지 되살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 제정 이후 법안을 근거로 기념사업 등에 막대한 세금이 투입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대한민국은 압축 성장 과정에서 권위주의 정권의 인권 탄압 흑역사가 있다. 우리 국민이 민주화 운동을 한 이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게 된 이유다. 그러나 이런 동정심을 악용해 부당한 사익을 취하려 한다면 용납할 국민은 없을 것이다. 2000년 민주화운동보상법 제정 이후 4988명이 받은 보상금이 1100억원이 넘는다. 이렇게 보상받은 사람들을 다시 국가 유공자로 예우하려 한다면 그 공적이 독립운동 순국선열이나 6·25 호국영령, 4·19나 5·18 민주 유공자에 준한다는 걸 입증하고, 국민적 합의를 이뤄낸 뒤 추진하는 것이 합당하다.
이런 과정을 건너뛰고 ‘민주화 운동 경력으로 국가의 보상을 받은 사람 가운데 사망 또는 부상한 사람’이란 기준만 충족하면 일단 ‘민주화 유공자’ 대상에 올라 신청 자격을 부여하는 법은 국민과 역사의 동의를 받기 어렵다. 야권에선 보훈부 심사위원회 같은 데서 적격성 여부를 판단하면 되지 않느냐고 반박하지만, 보훈부 심사위는 형사범죄 전력 정도나 걸러낼 수 있을 뿐, 법이 지정한 카테고리 자체는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얼마 전 80대 6·25 참전용사 A씨가 부산에서 반찬 8만원어치를 훔치다가 붙잡혀 즉결심판을 받았다. A씨 같은 참전용사 4만 명 중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곤층이 10명 중 7명에 달한다. 그러나 이들의 매달 참전수당은 39만원에 불과하다.
민주당이 ‘민주화 유공자’ 예우에 힘을 기울이는 걸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법을 제대로 통과시키고 싶다면 그 법이 적용될 대상에 대해 국민의 동의부터 구해야 한다. 이와 함께 나라 지키는데 몸 바치고도 생계형 범죄에 내몰린 A씨 같은 분들을 보듬는 모습도 보여주기 바란다. A씨의 비극이 알려지자 수많은 국민이 “가슴이 미어진다”며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사람이 먼저다”를 외쳐온 더불어민주당이라면 이런 민심을 받들어 민주유공자법과 함께 참전용사의 수당과 예우를 격상하는 법도 추진하는 게 맞지 않을까.
강찬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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