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올 네번째 ICBM 도발…윤 대통령 “대가 따를 것”
북한이 12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발사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 명의의 담화로 미군 정찰기를 격추하겠다고 위협한 지 하루 만이다. 북한의 ICBM 발사는 올해 들어 네 번째로, 지난 4월 13일 고체 연료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성-18형’을 발사한 이후 석 달 만이다.
북한의 도발에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리투아니아 빌뉴스에 머무는 윤석열 대통령은 현지에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소집하고 “북한의 불법행위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한·미 핵협의그룹(NCG) 회의를 통해 확장억제 실행력을 더욱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애덤 호지 미국 국가안보회의(NSC) 대변인은 성명에서 “미국은 북한의 장거리 탄도미사일 시험을 강력 규탄한다”며 “미국은 동맹인 한국과 일본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북한이 ICBM을 쏜 곳은 평양 순안 일대다. 합동참모본부에 따르면 북한은 오전 10시쯤 평양에서 동해를 향해 ICBM 1발을 발사했고, 직각에 가까운 고각으로 발사된 미사일은 1000㎞가량을 비행한 후 동해에 떨어졌다. 일본 방위성에 따르면 ICBM은 오전 11시13분 일본의 배타적경제수역(EEZ) 바깥인 홋카이도 오쿠시리섬 서쪽 약 250㎞에 낙하했다. 비행시간은 74분, 비행 거리는 1000㎞, 최고 고도는 6000㎞를 넘는 것으로 추정됐다. 일본의 분석대로라면 북한 ICBM은 이전보다 기술적으로 향상됐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3월 북한이 발사한 ‘화성-17형’과 비교했을 때 비행 거리는 1000㎞로 유사하지만 당시 6000㎞를 넘지 못했던 최고 고도를 넘어섰다.
북 ICBM 고도 6000㎞ 돌파…윤 대통령 “파리·런던 사정권”
미사일이 더 높은 고도까지 올라가면서 총 비행시간도 당시 69분11초에서 74분으로 5분가량 길어졌다.
미사일 전문가인 권용수 전 국방대 교수는 “이번 발사체는 고체 연료를 쓰는 신형 화성-18형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번 미사일의 비행시간과 궤도 등을 근거로 분석할 경우, 북한 화성-18형의 최장 사거리는 1만5000㎞를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탐지가 어려운 고체형 ICBM의 사정거리에 미국 본토 전역이 들어올 수 있다는 얘기다.
군 당국도 북한이 화성-18형을 사용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미사일의 세부 제원은 물론 북한의 추가 도발 가능성에 대해서도 분석하고 있다. 군은 북한의 도발이 탐지가 어려운 고체 연료 미사일의 성능을 검증하고, 이를 통해 한·미를 향한 위협의 수위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ICBM을 꺼내 든 북한의 도발이 김여정의 연쇄 담화 이후 이뤄졌다는 점에도 주목한다. 김여정은 지난 10일과 11일 미 공군 정찰기가 북한 영공 또는 EEZ를 침범했다며 “반복되는 무단 침범 시에는 미군이 매우 위태로운 비행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미 확장억제 실행력 더 강화할 것”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북한이 무력도발을 통해 한반도에서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려고 시도한 것”이라며 “특히 탐지가 어려운 고체 연료를 사용해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는 ICBM을 발사한 것은 한반도 내 주도권 경쟁의 대상이 한국이 아닌 미국이라는 점을 우회적으로 강조한 성격도 있다”고 말했다.
북한은 한·미·일 정상이 참여하는 나토 정상회의 기간에 ICBM을 발사했다. 북한은 지난 3월에도 윤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을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2시간40분 전에 ICBM을 발사했다.
윤 대통령은 나토 정상회의 외교로 북핵·미사일 압박 전선을 확장했다. 윤 대통령은 12일 나토 동맹국·파트너국 정상회의 연설에서 북한 ICBM 도발에 대해 “유엔 안보리 결의의 중대한 위반이자 지역과 세계 평화에 중대한 도발”이라며 “북한의 핵미사일은 이곳 빌뉴스는 물론이거니와 파리·베를린·런던까지 타격할 수 있는 실질적인 위협”이라고 말했다. 윤 대통령은 또 “나토와 상호 군사 정보 공유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나토의 군사기밀 공유 전산망인 ‘전장 정보 수립·수집 활용 체계’(BICES·바이시스)에 참여하겠다는 구상이다.
나토 정상회의를 위해 리투아니아에 모인 31개 회원국은 11일 공동성명에서 “우리는 북한이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비롯해 모든 대량살상무기(WMD)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으로 포기해야 한다는 점(CVID)을 재확인한다”며 “다수의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북한의 WMD와 탄도미사일 프로그램을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
미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적인 참여 기조를 밝혀온 정부는 나토까지 연계한 안보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과의 면담에서 “대서양 안보와 인도·태평양의 안보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상황”이라며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같은 인도·태평양 국가와 나토의 긴밀한 협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의 나토 연계 행보는 미 바이든 정부가 추구하는 통합억제와도 궤를 같이한다. 통합억제는 강력한 핵무기를 바탕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적 확장억제에 동맹들의 공조 개념을 더한 개념이다. 양자 동맹에 이어 다자 동맹으로도 경제제재, 수출 통제, 외교 조치 등 외교·정보·경제적 수단을 동원해 집단 안보를 확장한다는 취지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핵 위협 대응에 인도·태평양 국가와 나토가 함께하면 압박 카드로서 효과가 상당할 것”이라며 “군사 공동체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들 국가가 북핵 위협에 꾸준히 관심을 갖도록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진·왕이, 아세안회의서 만날 가능성
윤 대통령의 나토 정상회의 일정을 수행한 박진 외교장관이 동남아국가연합(아세안)과 관련한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2일 나토 회의가 열리는 리투아니아를 떠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향했다. 박 장관은 13일 한·아세안 외교장관 회의를 시작으로 아세안+3(한·중·일) 외교장관 회의에 참석하고, 이튿날엔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외교장관 회의와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교장관 회의가 예정돼 있다.
친강(秦剛) 중국 외교부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아세안 외교장관 회의에 불참함에 따라 중국 외교라인 사령탑인 왕이(王毅) 중앙정치국 위원이 수석대표로 참석한다. 한·중은 박 장관과 왕 위원의 회담을 조율 중이다. 한·중 고위급 회담이 성사될 경우 지난달 싱하이밍(邢海明) 주한 중국대사의 ‘베팅 발언’ 이후 고조된 긴장 국면을 해소할 마중물이 될 수 있다.
강태화·정영교·이근평·정진우 기자 chung.yeonggy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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