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아이가 자퇴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서부원 2023. 7. 1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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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나의 스승] 수능에 모든 것을 걸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

[서부원 기자]

 2024학년도 수능 대비 7월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시행된 11일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사례와 관련이 없습니다.)
ⓒ 사진공동취재단
 
대학에선 '반수', 고등학교에선 자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 영재들이 모여있다는 서울대 이공계열은 '의치대 사관학교'가 된 지 이미 오래고, 자사고나 국제고 등 특목고는 물론, 일반고에서도 의치대와 명문대에 다걸기 하는 아이들이 드물지 않다. 어차피 '인생은 한 방'이라는 거다.

교사로서, 공교육이 골병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괴롭다. 최근엔 학교의 역할은커녕 존재 이유마저 모르겠다는 교사들이 적지 않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는 무력감에 학교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할 때가 한두 번 아니라고 토로한다. 나중에 아이들이 알까 두렵지만, 나 역시 요즘 들어 수시로 퇴직 후 연금을 계산해 보는 습관이 생겼다.

학교의 시간은 '허송세월'이라는 아이들 

기말고사를 앞두고 한 아이가 또 학교를 떠났다. 이젠 그다지 낯설지도 놀랍지도 않다. 여느 때 같았으면 이유라도 물어볼 텐데, 굳이 묻지 않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학교생활 부적응이나 건강 문제가 주된 자퇴 사유였지만, 요즘엔 오로지 대학입시, 그것도 수능에 다걸기를 하기 위해 자퇴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자퇴하는 이들은,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허송세월'이라고 스스럼없이 말한다.

자퇴한 아이들의 선택지는 세 가지 중 하나다. 이른바 '독학 재수'를 위해 독서실에서 두문불출 공부하거나 대입 종합반 학원에 등록하는 것, 그리고 수도권 등지에 성업 중인 기숙학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들의 선택에도 경제적 여건에 따라 엄연한 서열이 존재한다. 형편이 어려우면 한 달에 몇 백만 원을 호가하는 기숙학원은커녕 대입 종합반조차 등록하기 힘들다.

지금껏 자퇴한 아이들의 면면을 보면, 대개 가정 형편이 넉넉한 편이다. 자퇴가 대입을 위한 또 하나의 수단이라면, 그들이 손에 쥔 선택지는 여느 아이들보다 많다는 뜻이다. 의치대에 합격할 때까지 도전해볼 작정이라는 한 아이의 다짐은 그때까지 부모가 경제적으로 뒷받침할 능력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내신 성적과 교내 활동 등 그동안 누적된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의 기록을 모두 포기한 만큼 그들은 죽기 살기로 수능 준비에 다걸기 한다. 취미활동은커녕 친구 관계도 정리하고, 대학 진학 때까지는 명절을 쇠는 것도, 휴가를 떠나는 것도 기꺼이 보류한다. 그 흔한 가족끼리의 식사 시간조차 아까워하며 맹목적으로 기출 문제 풀이에만 매달린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일단 의치대나 명문대에 합격하기만 하면 그 모든 걸 보상받게 될 거라고 확신한다. 한 아이는 이른바 '과잠'을 입고 대학 축제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될 것 같다고 웃으며 말한다. 내신 성적에서 단 한 등급만 올릴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아이들이 태반인 현실에서 우리 공교육은 만신창이가 됐다.

아이들은 극단적으로 서열화한 학벌 구조 속에서 '인생은 한 방'이라는 부박한 가치관을 시나브로 내면화해버렸다. 놀랍게도, 수능과 같은 일제고사를 거친 결과라면 승자독식을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문제 삼기는커녕 공정하다고 규정하며, 문제 삼는 이들을 되레 지질하다고 비난한다. 그들 사이에서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불공정한 입시의 상징으로 낙인찍힌 이유다.

정확하게는 공정과 불공정의 문제가 아니다. 학종과 수능은 각각 장단점이 상존하고 상호 보완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전형이다. 그런데도 수능이 공정한 이유를 물으면, 아이들은 대뜸 학종이 불공정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인식 속에 학종의 문제점을 손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공정한 수능이 있는데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느냐는 거다.

"수능은 고3 때라도 승부를 볼 수 있지만, 학종은 이미 고1 때 결판이 나죠."

지금 심각하게 자퇴를 고민하고 있다는 고2 아이는 학종이 불공정하다고 여기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고2 무렵에 공부에 흥미를 느껴 대입을 준비하는 아이가 있다면 기껏해야 서울 지역의 유명하지 않은 사립대와 지방의 국립대에 진학할 수 있을 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내신 등급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 때부터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는 거다.

결국 의치대나 명문대를 목표로 한다면, 고1 때부터 줄곧 모든 과목의 내신 1등급을 유지해야 한다. 2등급 이하가 한두 과목만 나와도 물 건너간다. 그럴 경우, 자퇴 후 수능에 다걸기 하는 게 의치대나 명문대에 진학하는 사실상 유일한 방법이다. 아이들이 학종을 두고 '패자부활전'이 없는 전형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남느냐, 떠나느냐' 최상위권 아이들의 숨겨진 싸움 

그렇다고 자퇴라는 선택이 분명 쉬운 건 아니다. '기회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친구들과의 관계가 순간 단절되는 것은 물론, 자퇴생이라는 우리 사회의 여전히 따가운 시선도 감내해야 한다.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10대 후반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다. 과연 갑작스레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계획적으로 보낼 수 있느냐는 두려움도 엄습한다.

아무리 철없는 아이들이라도 곧바로 자퇴를 감행하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자신의 학생부 기록 정도로는 의치대나 명문대에 진학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설 때라야 가능하다. 일단 고1 때 내신 성적을 올리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한다. 학기에 두 번 치르는 지필평가는 말할 것도 없고, 수행평가를 대비하는 데도 밤샘을 마다하지 않는다.

내신 성적 산출 방식이 상대평가인 이상 어떻든 등급이 매겨지고, 학년말이 되면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성적에 맞춰 진로를 '급변침'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오매불망 의치대와 명문대 진학을 꿈꾸는 최상위권 아이들은 '잔류파'와 '자퇴파'로 나뉜다. '잔류파'는 학종으로도 능히 갈 수 있는 '현재 1등'이고, '자퇴파'는 수능을 통해 '1등'에 합류하려는 아이들이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고1 때부터 이미 최상위권 아이들은 '남느냐, 떠나느냐'를 사이에 두고 피 튀기는 내신 등급 경쟁을 벌이고 있다. 덩달아 지필평가를 출제하는 고1 담당 교사들도 괴롭다. 시험 문제의 오류는 말할 것 없고, 동점자가 많아 등급을 변별하지 못해도 낭패다. 오로지 한 줄로 등급을 산출하기 위해 온갖 하찮은 문항을 출제하는 이유다.
 
 2024학년도 수능 대비 7월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시행된 11일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시험이 끝나고 성적이 산출돼도 '전쟁'은 계속된다. 출제 문항에 대해 아이들의 이의 신청이 줄을 잇는다. 서술형 문항은 물론, 선다형 문항조차 온갖 이유를 대며 부분 배점을 요구하고 복수 정답을 인정해달라고 떼를 쓴다. 특히 자신의 점수가 등급과 등급 사이에 걸쳐 있는 어중간한 경우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문장에 오탈자가 있다거나 사용된 조사나 어미를 트집 잡기도 하고, 도표가 흐릿해 문제 풀이에 방해가 됐다는 건 전가의 보도다. 심지어 교과서에 서술된 내용이 모호하다며, 관련된 인물과 사건에 대한 학위 논문 등을 인터넷 등에서 끌어와 항변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중간에 '브로커'가 개입되어 있지 않나 싶은 의심마저 든다.

온갖 노력에도 자기가 쓴 답이 정답 처리될 가능성이 없으면, 문제 자체가 잘못됐다며 재시험을 요구하는, 이른바 '물귀신 작전'도 서슴지 않는 아이도 있다. 어떻게 해서든 단 1점이라도 점수를 올리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최상위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정도 '뻔뻔함'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문화가 아이들 사이에 팽배해있다.

급기야 같은 교실 내에서 친구가 친구를 부정행위로 신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능 시험장에서 이따금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종일 함께 생활하는 동급생끼리는 웬만해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커닝 페이퍼'를 작성했거나 서로 보여주고 보는 행위라면 모를까, 신고 내용이 사소하기 짝이 없어 어떻게 대처할지 몰라 교사로서 당황스럽다.

시작종이 울리기 전에 시험 문제를 봤다는 거다. 수능 시험지는 겉표지가 따로 있어 펼치기 전까지는 문제를 볼 수 없지만, 교내 시험에서는 그렇지 않아 배부될 때부터 볼 수 있다. 감독 교사는 필기도구를 놓고 답안지를 시험지 위에 올려두라고 안내하지만, 고개 숙여 슬쩍 들여다보는 것까지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다.

이는 내신 성적이 어슷비슷한 친구들 사이에서 주로 벌어진다. 어떻게든 친구의 성적이 떨어져야 자기의 등급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줄 세우는 상대평가에 길들어진 일부 아이들의 대응은 이토록 모질다. 

자퇴하는 아이들과 고1 때부터 내신 성적에 목숨 거는 아이들을 나무랄 순 없다. 지금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각자도생과 승자독식의 가치관이 횡행하는 무한경쟁의 정글로 전락했다. 그곳에 아이들을 욱여넣어 놓고선 그들의 행태를 문제 삼는 건 제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다.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드는 법, 우리 아이들은 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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