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애 원장의 미용 에세이] 누군가 날 위하여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찾아갔다. 이번에도 적당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지금까지 해오던 일을 그만두라는 남편의 강한 어투의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오늘은 좋은 사람을 꼭 만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으로 직업소개소를 찾았다.
“저 아가씨 아직도 있네요.”
“네! 저 아가씨를 데려가겠다면 우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소장은 이유를 말해주었다. 아가씨는 자신이 일하던 집주인과 큰 사건이 있어 그 집을 뛰쳐 나왔다는 것이었다. 모 재벌 집인데 그 댁 큰아들이 밤마다 담장을 넘어 사귀던 여자를 데려와 부모 눈을 속이는 잘못된 윤리관을 가진 것을 준이는 훤히 알고 있었다.
그 여자와 밤마다 밀회하는 것을 자신의 부모가 알게 되면 자기는 부모에게 버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준은 자신의 신분은 가정부에 불과 한데 여러 차례 여자가 바뀌는 것을 보았으나 재벌 집 아들의 잘못된 윤리관을 비웃었을 뿐, 그 부모에게는 철저히 비밀을 지켜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는 날 갑자기 그 댁 아들이 부모와 충돌이 생기자 모든 잘못을 어린 가정부에게 전가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이다.
집주인은 갑자기 전라도 년이 들어와서 우리 가정을 혼란케 만든다는 말을 거침없이 해대는 대도 그 오빠는 자기 어머니의 분노에 대해 눈치만 보며 자신의 죄를 덮는 데만 급급한 것을 보며 “너는 나쁜 놈이다. 비겁한 놈이다” 했더니 뜨거운 커피를 가정부인 준이에게 뿌렸다는 것이다. 팔뚝에 화상을 입은 준이 억울한 나머지 자제력을 잃고 식당에 거창한 차단스를 끌어다 둘러 엎었다니 그 사건으로 인해 경찰이 출동했으나 아들의 주색잡기 행각이 들통날 것이 두려웠음인지 그 아들은 자신이 아가씨에게 화상을 입혀서 일어난 일이었다고 경찰을 설득해서 마무리는 되었다는 것이다. 준이는 그 댁 어른들의 비정함과 그 아들의 병든 윤리관에 회의를 느끼고 뛰쳐 나왔을 것이다.
어른들이 약자에 대한 배려심이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가씨에게 해명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전라도 년이라고 욕을 퍼부으며 모멸감을 준 것이 원인이었다.
“주인집에서 잘못이 컸네요. 아가씨도 직업의식이 없었고요.”
“사람이 자기 성질을 다 부리고 살 수 있는 곳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요.”
“네! 저는 저 아가씨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끝까지 참고 사과받고 또 용서하고 했어야 상처가 남지 않았을 것을 말입니다. 아가씨는 식당으로 가서 일해야 할 것 같은데 가정집을 원하니 소개하기가 어렵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순간 누군가를 보듬는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소장에게 아가씨를 내가 데려가겠으며 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소장님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그날 그 아가씨를 데리고 나서며 모순투성인 세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준이는 어려서부터 새엄마 밑에서 자랐다고 했다. 새엄마를 맞아들인 후로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까지 남이 돼버리더라고 했다. 쉽사리 꺼내 놓기 어려운 가정사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 말하고 있었다. 소개소에서 여러 날을 기다리며 밥값까지 밀려있는데 자진해서 준이를 데려온 것에 대해 의아한 눈치였다. 직업소개소 소장은 나를 따라 나오면서까지 “어린 자제들 두셨으면 성품이 좋아야 하는데 걱정이네요”라고 했다. 그분들의 말을 들으면서 준이의 얼굴을 바라보니 그에게는 미소가 없었다.
하기야 그 상황에서 어떻게 웃음이 나오겠는가. 어린 시절부터 상처 입은 그 가슴을 어떻게 치유해주어야만 서로 흉금을 털어 소통하는 가족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솔직히 한편으로는 염려스럽기도 했다. 기쁨이 사라진 표정에서 맘고생을 많이 하고 살아온 삶이 읽혀 안쓰럽기까지 했다. 어쩌면 지난번 일하던 집주인과 다툼은 삶의 상처 때문에 감정조절이 잘 안 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처럼 믿고 귀하게 여긴다면 그 마음의 생채기가 아물겠지, 나는 짧은 묵상을 하고 있었다. 내 필요를 위해 사람을 찾아온 것이니 먼저 내가 준이의 마음에 안정과 평안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일평생 사회 선배로서 의지하고 따를 수 있는 좋은 주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날이었다.
내가 준이 나이 먹었을 무렵 나도 서울 종로 한복판에 취직자리를 찾아 헤맸다. 미용기술을 익혀 자격증을 따고 취직을 위해 면접을 보는 날이었다. 나를 채용한 그 원장님은 면전 에서 노골적으로 전라도 사람이라고 비호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나는 전라도 애들은 안 쓰는데 테스트 케이스로 너를 한번 써보겠다”는 말에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모른다. 칼날보다 아프게 가슴을 베고 지나간 말은 내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나는 남도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때때로 불이익을 당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최고의 헤어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마음속으로 칼을 갈았다. 성실함은 기본이었고 쉬지 않고 새로운 기술을 익히려고 최선을 다했다. 몇 년이 지난 뒤 주인은 “너 닮은 동생 하나 없니? 데려다 기술 가르치면 좋을 것 같아서”라고 했다.
나는 망설여졌지만 내 동생까지 부탁하는 것은 나를 인정하는 말이기에, 그 고마운 마음이 나를 움직였다. 내가 일하던 미용실을 종업원이 30명이 넘는 서울에서도 손꼽히는 곳이었다. 우리 자매의 성실함을 본 원장님은 전라도 사람이 얼마나 부지런하고 성실하며 정직한 사람들인지 인정하면서도 칭찬에는 인색하며 종종 차별대우를 받기도 하였다. 전라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신랑감이 S 공대생이 사실이냐고 의심하며 누가 소개하였느냐? 놀랍다고 뒷담을 했던 원장님이었다.
우리 인생길에서 그 어떤 역경이라도 삶에 철학과 규범이 바른 자를 무너뜨릴 고난은 없을 것이다. 크고 작은 회초리는 우리를 날마다 길들인다. 어딜 가거나 일일권인 작은 나라에서 갈라진 남북의 아픔도 모자라 동서의 지역갈등을 유발하는 병든 마음들, 반드시 사라져야 할 선입견이다.
준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먼저 어린 아들과 딸을 소개했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저녁 늦게 집에 들어오니 하숙생이며 준이는 우리 집 청지기라고 일러줬다.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는 가정이라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함께 무릎 꿇어 기도했다. 준이와 시간을 보낼 때마다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준아! 예수님도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이셨고 유대인들의 괄시를 받으셨단다. 시골 목수의 아들이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냐며,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형으로 죽이셨어. 우리 같은 죄인들이 괄시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라고 하면 준이의 눈이 반짝였다.
우리의 만남이 인생의 한 토막 아름다운 추억이 되게 하자고 부탁했다. 수년이 지난 뒤 군 복무 중이던 준이의 고향 선배에게서 감사 편지가 왔다. 나도 심지가 깊은 준이를 칭찬하며 답장을 보냈다. 두 사람은 애틋하고 돈독한 믿음 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 날은 내 손으로 준이를 최고의 신부로 꾸며주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을 낳아 믿음으로 잘 키워 냈다. 자신의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도 내가 7월 삼복더위에 막내를 해산하게 되었을 때 쫓아와 지극정성으로 산후조리를 해주었다. 얼마 후에 우리 가족이 해외로 떠나게 되었고 준이와 소식이 끊겼다. 세월이 많이 흘러갔는데 어느 날 준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방송국에 수소문해서 찾아 온 것이다. 준이는 보고 싶었다며 펑펑 울었다.
“그때 그 직업소개소에서 말리는데도 언니는 나를 왜 데려왔어요. 언니를 잊을 수가 없어요. 긴 세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언니 형부를 생각하며 기도해 왔습니다. 언니 영영 못 만나는 줄 알았어요.”
준이는 분식집을 한다면서 샌드위치를 한 보따리 싸들고 왔다. 모진 삶을 이겨내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머리는 반백이 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고난을 통해 정금 같은 신앙인이 된 것이다. 절절한 하나님의 사랑이 준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진실한 얼굴에는 누구에게나 말로 설명이 안 되는 빛이 있다. 우리가 함께 사는 동안에도 준이는 한결같이 성실하고 정직했다.
“나는 언니 집에서 어린 조카들과 함께 살던 때가 행복했어요. 인자하던 형부의 환한 미소가 자주 생각나요. 세상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가족도 있다는 걸 알고 감동했어요” 라는 고백을 들으며 준이와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준이는 얼마 전에도 교통사고로 고비를 넘겼다. 삶이 고난이며 고난은 숨겨진 축복임을 이미 아는 준이는 큰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 서로 소식이 단절되었을 때에도 새벽 제단에 나를 위한 기도를 쉬지 않았다는 말이 가슴을 때린다. 반세기가 가까워져 오는 지금까지도 손수 음식을 만들어 종종 나를 찾아주는 아우, 내가 외로울까 봐 걱정하는 준이가 고맙다. 세상에 사람 관계보다 더 아름다운 연합이 있을까, 나는 날마다 배우며 살아간다. 주 안에서 사람을 일궈 내는 일보다 더 소중한 가업이 없다는 것을 날마다 느끼게 된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 태어나고 사랑받기 위해 살아가는 그 누구나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사랑의 빚을 많이 졌다.
준이가 가정을 지켜 주었기에 근심 없이 가정과 일터를 지켜낼 수 있었다. 여전히 인생은 고달프다. 힘든 삶 가운데서도 변함없는 진실한 사랑의 중심을 지닌 사람에게는 날마다 숨겨진 축복의 통로가 열리는 것을 든든히 믿는다. 그 사랑은 영원한 사랑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 사랑의 지경은 동서고금으로 넓어지고 지금도 누군가 날 위하여 이 세상 끝날까지 누군가 날 위하여 기도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해거리>
집을 나서는 도시의 농부
하루치의 수확물을 들고
희열을 안고 벅찬 걸음으로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찾아
해 저물면 집으로 돌아가는,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
은총 받은 사람이어라
또 다른 발걸음도 있다
잡힌 것이 없는 빈손,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간 희망
천근의 가난 만근의 고뇌
주머니 속을 더듬는 빈손,
희망은 갈대처럼 흔들리고
지쳐있는 무수한 이 땅의 아버지들
나라를 받쳐주는 기둥이다
가지들이며 잎새들이다
우람한 나무도 해거리를 한다
빛나던 열매 맺기를 멈추고
비워버린 겸허한 모습
모든 에너지를 끌어 모으고
재충전하는 것 자연의 섭리일터
열매 없다 타박하는 눈앞에
저 의연한 나목을 보라,
다독이고 매만지면 드러내는 내면
해거리는 미래를 믿는 믿음
우리들 삶에도 해거리가 있다
열매 없어 부끄러운 나무
잡힌 것 없는 빈손,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온다
고난을 딛고 질곡을 넘어
탐스런 열매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김국애 원장은 서울 압구정 헤어포엠 대표로 국제미용기구(BCW) 명예회장이다. 문예지 ‘창조문예’(2009) ‘인간과 문학’(2018)을 통해 수필가, 시인으로 등단했다. 계간 현대수필 운영이사, 수필집 ‘길을 묻는 사람’ 저자. 이메일 gukae8589@daum.net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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